7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온라인으로 개최한 현장 기자간담회를 통해 인골이 2017년 국내 최초의 인신공희 사례로 알려져 화제를 모은 50대 남녀 인골 2구 발견 지점으로부터 50㎝ 떨어진 곳에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인골은 얕은 구덩이를 판 뒤 안치했으며, 위에는 풀과 나무판자를 덮었다. 주변에는 동물뼈 등이 함께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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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골은 키가 135cm 정도로 체격이 왜소하지만 연구소는 20대 전후에 사망한 성인 여성으로 추정했다. 인골의 뼈 융합상태를 봤을때 성장이 모두 끝난 성인의 뼈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목이 살짝 꺾인채 묻힌 인골은 굽은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와 팔찌를 착용했고, 왼손 손가락 사이에는 복숭아씨 한 점이 나왔다. 머리맡에서는 토기 2점이 포개진 채로 확인됐다.
이런 인골 특징과 매장 모습은 4년 전 조사된 인골 2구와는 다소 다르다. 2017년 발견된 인구는 신장 165.9㎝인 남성 인골은 똑바로 누워 있었고, 153.6㎝인 여성 인골은 곁에서 남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물 뼈나 장신구는 없었고, 남성 인골 발치에서 토기 4점이 나왔다. 장 연구사는 “50대 인골 2구가 먼저 묻히고 여성 인골이 거의 연속적으로 매장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들 인신공희로 추정하는 근거로는 함께 발견된 동물 뼈와 유구가 묻혀있던 모습을 들었다. 동물 뼈는 말·소·사슴·멧돼지 등 주로 제물에 사용되는 덩치가 큰 포유류의 늑골 부위를 선별해 묻혀있었다. 또 성벽의 중심 골조 가장자리에 맞춰 평행하게 시신을 둔 점이나 문지 근처라는 위치를 볼 때 계획적으로 인신 제사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인신공희를 했던 것일까. 연구소 측은 제방을 쌓거나 건물을 지을 때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매장하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설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중국에서는 상나라(기원전 1600∼기원전 1000년쯤) 시기에 성벽 건축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쓰는 풍속이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사’에 충혜왕 4년(1343) 인주 설화와 관련된 유언비어가 항간에 돌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인골은 사망한 뒤 묻은 것으로 보여진다. 인골이 하늘을 바라보는 편안한 상태고, 저항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골 연구를 담당한 김헌석 연구소 주무관은 “어떤 경위로 죽었는지 사인 추정이 되는 흔적은 없어 추가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라면서 “외상의 흔적은 없다”고 말했다. 또 인골 3구의 영양상태가 좋지 않고 고급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신분이 낮은 인물들이 희생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례가 신라인이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치른 의례 행위를 명확히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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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조사를 통해 연구소는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월성의 축성 시기와 과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껏 월성의 축성시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빠르게는 3세기부터 늦게는 5세기까지 의견이 나위었다. 문헌에 따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사료에는 월성이 파사왕 22년인 서기 101년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됐다. 이번 조사에서 유물 조사와 약 40점의 시료를 대상으로 한 가속질량분석기(AMS) 분석을 통해 문헌보다 250년 정도 늦은 4세기 중엽에 공사를 시작해 5세기 초반 완공된 것으로 확인됐다.
서성벽의 규모는 높이 10m·너비 40m 정도로 추정됐다. 월성 성벽 기초부는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 말뚝을 박고, 식물류를 층층이 까는 방식으로 조성했다. 이어 인신공희를 한 뒤 가운데에 토루(흙을 다져 쌓아 올린 시설물)를 만들고, 주변을 볏짚·점토 덩어리 등으로 쌓은 것으로 조사됐다.
월성 성벽 축조 시점이 명확해지면서 신라사 연구의 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4세기 중엽은 사로국이 주변 지역을 병합하면서 신라 국가로 나아가는 시기”라며 “왕호를 마립간이라 하고 적석목곽분을 조성하던 즈음에 월성이 축조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