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상장사 B사는 당기순이익으로 연구개발(R&D) 투자를 하려 했으나 최근 상법 개정 논의가 이루어지며 고민에 빠졌다. 배당률 상향을 주장하는 주주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사충실의무 위반으로 이사들이 배임죄로 신고·고소 당할 수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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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4일 상법 개정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이번 정기국회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민주당이 당론으로 채택한 상법 개정안은 △주주의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 △대규모 상장사 감사위원 2명 이상 분리 선출 △집중투표제 △전자 주주총회 개최 등이다.
◇ “지배구조 관련 법제도 종합적 검토 필요”
이 같은 내용의 상법 개정이 기업의 경영 혼란을 야기할 수 있어 경영권 방어 수단을 도입하거나 상속세를 완화하는 등 기업 지배구조 관련 법제도 전반에 대한 검토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재계는 강조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8일 ‘밸류업과 지배구조 규제의 최근 논의와 과제’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단기주주 이익과 장기주주 이익 상충시 분쟁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불분명하고 추상적인 규정으로 기업 혼란을 가중하는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곽관훈 선문대 교수는 ‘이사 충실의무의 해외 입법례와 국내법 적용’을 주제로 강연했다. 곽 교수는 “우리나라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인 일본은 물론 영미법에서도 이사는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며 “이사의 주주에 대한 의무를 판례로 인정한 경우는 있어도 법에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총주주의 이익’, ‘주주의 비례적 이익’, ‘주주를 공정(공평)하게 대할 의무’ 등이 개념적으로 모호하고 이사의 구체적인 책임범위와 행동지침을 제공하지도 못하는 내용의 불명확한 법 개정은 부작용이 크다고 봤다. 곽 교수는 “불명확한 법 개정은 이사의 경영판단을 위축시켜 기업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1981년 상법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도입하는 방안, 2014년 모회사 이사의 자회사 감독책임을 명문화하는 방안 등이 검토됐지만 개념과 책임 범위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개정이 보류된 바 있다. 곽 교수는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가 선언적 규정에 그친다 해도 판례 등으로 구체적 기준이 정립되기 전까지는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을 크게 증대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 상법 개정, 밸류업 만능열쇠 아니다
최승재 세종대 교수는 “지금 문제가 되는 이해상충 사례들은 ‘이사 대 주주’가 아닌 ‘지배주주 대 일반주주’”라며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인정해도 배당 등 단기주주 이익과 신사업 발굴 등 장기주주 이익이 상충할 때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주주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하는 경영은 사실상 불가능해서다.
최 교수는 집중투표제 의무화나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에 대해서는 “기업 활력 저해 등 부작용이 우려되는 일률적·경직적인 규제 도입보다는 이 제도가 기업가치 제고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기업들이 자유롭게 도입 여부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상법 개정이 기업 가치 제고의 만능열쇠가 아니란 의견이다.
이어 최 교수는 상법과 세법, 공정거래법 등 관련 법제를 유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배구조 문제와 연관된 상속세 개선과 경영권 방어수단 보완, 공정거래법상 계열사간 내부거래에 대한 사익편취 규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 등을 더 넓은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지는 토론에서도 소수주주 보호를 위해 법이 아닌 연성규범을 통해 주주 간 이해상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법 체계 전반에 파급효과가 큰 상법 개정이 아니라 사례별로 해결하는 ‘핀셋 보완’이 필요하다는 대안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