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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수양아들 글씨가 국중박에?…'친일 소장품'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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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기자I 2026.10.19 13: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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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진압 앞장선 친일파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처벌 피해
전시된 박중양 유묵, 유홍준 관장 소장품 ‘파문’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밥 한 그릇도 나라의 은혜다.’ 나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유묵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이 때아닌 논란의 중심에 섰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 애국지사의 작품으로 소개됐던 글씨가 알고 보니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1874~1959)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유묵의 소장자가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라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파문이 커졌다. 1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국립중앙박물관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
박물관은 지난 8월 해당 작품이 박중양의 글씨라는 제보를 받은 뒤 전시에서 철수했다. 이후 전문가 7명의 교차 검증을 거쳐 박중양의 작품임을 확인하고 사과했다. 당초 애국지사 박원근의 글씨로 알려졌지만, 박중양이 사용했던 이름 ‘박원근(朴源根)’과 혼동한 것으로 파악됐다. 박중양의 자(字) 역시 ‘원근(源根)’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글귀와 실제 인물의 삶 사이에 놓인 간극이다. 나라의 은혜를 이야기한 박중양은 정작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박중양은 조선 초대 통감이자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로 알려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874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그는 1897년 관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 아오야마학원에서 공부한 뒤 경찰제도와 감옥제도, 은행 업무 등을 익혔다. 일본에서는 ‘야마모토’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귀국 후에는 일본군 통역관으로 러일전쟁에 참여했고, 의친왕의 일본 방문에도 통역 수행원으로 동행했다. 이후 대구군수와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지내며 관료로서 입지를 넓혔다.

그의 이름은 대구의 역사에도 남아 있다. 1907년 대구읍성 철거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박중양이다. 조선시대 대구를 둘러싸고 있던 성곽이 허물어지면서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를 비판하는 ‘중양타령’까지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오랜 세월 도시를 지켜온 성곽을 허문 인물의 이름이 노래에까지 등장한 것이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그의 출세는 계속됐다. 충청남도 장관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황해도·충청북도 지사 등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진압할 목적으로 ‘자제단’을 조직하고 직접 단장을 맡았다. 이후에도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으로 활동했고, 학생들에게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에도 참여했다. 1935년 발간된 ‘조선공로자명감’에서는 일제 식민통치 25년간 최고의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둔 1945년 4월에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선임됐다. 일본 천황이 임명하는 귀족원 의원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해방 이후인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폐렴으로 병원에 옮겨져 치료받는 과정에서 자유의 몸이 됐고, 결국 처벌받지 않았다. 그는 1959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중양의 행적은 훗날 정부의 공식 조사에서도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됐다. 일본 유학을 떠난 청년이 식민통치의 핵심 협력자가 되고, 해방 이후에도 처벌을 피한 그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보여준다. 한 세기가 지나 박물관에 등장한 ‘나라의 은혜’라는 글귀가 새삼 역설적으로 읽히는 이유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됐던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 유묵(사진=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됐던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 유묵(사진=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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