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대신 '판소리' 들려주는 판사 민일영 대법관

전재욱 기자I 2015.08.26 21:31:40

"영화 서편제 보고 우리소리에 빠져 판소리 배우기로"
"우리소리는 살아 있다. 좋은 소리다. 그래서 한다"
다음달 16일 퇴임…흥부가 완창하는 것이 목표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법대가 아닌 무대에서 선 현직 대법관. 법전이 아닌 부채를 손에 쥐고, 법복 대신 개량 한복을 걸쳤다. 판소리 흥부가의 한 대목인 ‘화초장’을 뽑아내는 목소리가 꽤나 걸쭉하다. 고수(鼓手)의 추임새에 맞춰 놀부처럼 궁둥이를 흔드는 모습을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무대의 주인공은 국립국악원이 26일 주최한 ‘차와 이야기가 있는 오전의 국악 콘서트-다담’(茶談)에서 만난 민일영(사법연수원 10기·60) 대법관이다.

민 대법관이 처음 판소리와 연을 맺은 시기는 1993년이다. 서울민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은 당시 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충무로와 관객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영화 서편제의 임권택 감독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서울민사지법에서 일하고 있던 민 대법관에게 ‘임 감독을 섭외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수소문해보니, 임 감독은 지리산에서 후속작 ‘태백산맥’을 찍고 있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민 대법관은 임 감독에게 손 편지를 쓰기로 했다. 민 대법관은 편지를 쓰기 전에 최소한 서편제라도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영화관을 찾은 것이 판소리에 빠진 계기가 됐다.

그는 “서편제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우리에게 이런 소리가 있었는데, 왜 난 몰랐을까. 배우고 싶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내리 세 번이나 영화관을 찾을 정도로 영화에 흠뻑 취했다. 임 감독은 민 대법관의 진심을 읽고 흔쾌히 강연을 허락했다. 그는 내친김에 임 감독을 따라온 서편제 주인공 배우 오정애씨에게 가르침을 청해 허락까지 받았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소리할 시간이 없었다. 다시 오씨를 찾은 건 10년도 더 지난 2005년. 지천명(知天命) 이라는 50세가 되던 해다. 그러나 오씨는 이미 소리판을 떠난 지 오래였다. 오씨는 민 대법관에게 김학용 명창을 소개했다. 그는 김 명창을 사사하고, 이후 1주일에 한 번씩 소리를 배웠다. 올해로 11년째다. 쉬는 날 산속에서 온종일 소리만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무던히 노력했다.

“사법시험 준비하는 것보다 소리 공부하는 게 더 힘들었다”는 민 대법관에게 이날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 정은아씨는 ‘왜 소리를 하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 소리는 하는 사람마다 다르고, 언제 하는지에 따라 다르고, 어디서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살아 있는 소리다. 좋은 소리다. 그래서 한다”고 했다.

민 대법관은 집무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춘양가 사설(판소리에서 창을 하는 중간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엮어 나가는 부분)과 부채를 놔둔다고 한다. 사건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는 원안철 명인의 대금 연주를 즐겨 듣는다. 민 대법관은 다음 달 16일 법복을 벗는다. 그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는 생각에 시원섭섭하다. 일단은 좀 쉬고 싶다”고 했다. 민 대법관 인생 제2막의 목표는 흥부가 완창이다.

민일영 대법관이 26일 국립국악원이 주최한 ‘차와 이야기가 있는 오전의 국악 콘서트-다담’(茶談)에 나와 흥부가의 한 대목 화초장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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