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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리콴유 전 총리는 앞날이 불투명했던 신생 독립국 싱가포르를 오늘날 강소국 반열로 끌어올린 지도자다. 특히 서구와 다른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를 내세우며 아시아 신흥국의 롤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 생존을 위한 개방‥신생독립국서 강소국 반열
싱가포르의 면적은 718㎢로 서울(605㎢)보다 조금 큰 수준이다.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했지만 별다른 자원도 없고 인구도 적은 소국(小國)이었다. 국가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총리에 취임한 리 전 총리는 경제성장에 매진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리 전 총리는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내수 경기에 의존하기 어렵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길목으로 교역이 활발한 무역도시라는 점에 착안해 적극적인 개방에 나섰다.
또 미래를 위해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싱가포르 항만공사를 설립해 세계 일류 수준의 컨테이너 항구를 건설했고, 석유파동 속에서도 미래에 대비해 창이 국제공항을 건설했다. 당시 국내에서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리 전 총리를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장기적 안목의 투자는 싱가포르를 물류 중심지, 동서양 항공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또 세계 유명 금융기관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일으켰다.
독립 당시 400달러 수준이었던 싱가포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그가 총리직에서 퇴직한 1990년에 1만2750달러를 달성했다. 30년 만에 서른 배가 늘어난 것이다.
◇아시아는 서구와 다르다‥강력한 리더십 구축
리 전 총리의 통치 철학은 ‘아시아적 가치’다. 아시아가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사회적인 효용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일부 제한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리 전 총리는 자유보다 질서를 강조하며 통치기간 동안 강력한 법치로 다스렸다. 재임 시절 담배꽁초 투기, 화장실 물 내리기 등 사소한 부분까지 통제했다. 이 같은 통치방식은 부패가 적고 거리가 깨끗한 나라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만든 바탕이 됐지만, ‘온건한 독재’, ‘가부장적 통치’로 불렸다. 아시아의 히틀러로 불리기도 했으며, 아시아에 만연했던 독재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두고 “카리스마와 두려움의 독특한 조합”이라며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신흥 개발국의 롤 모델이 됐다”고 평가했다.
◇한국과의 인연 각별‥생년 4번이나 찾아
리콴유 총리는 한국과 인연도 각별하다. 그는 10·26사태 발발 1주일 전인 1979년 10월 19일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총 4번 한국을 찾았다.
2000년 9월 출간된 회고록 일류 국가의 길에서 리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의 첫 인상에 대해 “날카로운 얼굴과 좁은 콧날을 지닌 작고 강단 있게 생긴 분으로 엄격해 보였다”며 “영어를 할 줄 아는 그의 20대 딸 박근혜의 통역으로 우리의 대화는 진행됐다”고 박 대통령은 당시 작고한 모친인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또 리 전 총리는 1981년 창이공항 건설공사에 참여한 현대건설의 젊은 사장, 이 전 대통령을 집무실로 불러 5분짜리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고 이 대통령이 깊은 인상을 받아 국정운영에 이를 반영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아시아적 가치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김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이었던 1994년 미국의 유력 정치평론지 ‘포린어페어’ 기고문을 통해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다. 경제 성장을 위해 민주주의를 제한할 수 있다는 아시아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