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서 佛작가 부르시에-무주노 설치작품 지름 12m 수조 3개·도자기 그릇 800개 우연한 충돌이 음악으로…철학적 ‘일탈’서 착안 “함께 아름다움 나누고 몽상에 빠지는 초대”
[뉴욕=이데일리 성주원 특파원] 파란 물 위를 하얀 도자기 그릇들이 천천히 떠다닌다. 어느 순간 속도를 늦춘 그릇들이 서로 만난다. 가볍게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내더니 이내 다시 흩어진다. 빠르게 움직이던 그릇 하나가 수조 벽에 막혀 멈춰 선다. 잠시 뒤 뒤따라오던 다른 그릇이 부딪힌다. 멈춰 있던 그릇은 방향을 바꿔 다시 움직인다.
관람객들이 수조 주변에 둘러앉아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성주원 특파원)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파크애비뉴 아모리(Park Avenue Armory)에서 만난 프랑스 예술가 셀레스트 부르시에-무주노(Celeste Boursier-Mougenot)의 설치작품 ‘클리나멘(clinamen)’이다. 6월 10일부터 이날까지 열린 이번 전시는 클리나멘의 역대 최대 규모 설치이자 20여년 만에 뉴욕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파크애비뉴 아모리의 대형 전시장인 웨이드 톰슨 드릴홀(Wade Thompson Drill Hall)에는 지름 40피트(약 12.2m), 깊이 14인치(약 36㎝)의 원형 수조 3개가 설치됐다. 각 수조에는 1만갤런(약 3만7854리터)이 넘는 물이 담겼고, 크기가 서로 다른 흰색 도자기 그릇 약 800개가 떠 있다. 수조 아래 물 모터가 흐름을 만들고, 작가가 직접 음색과 움직임을 고려해 고른 그릇들이 물 위를 떠다니다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수조 위에서 그릇들이 떠다니다가 서로 부딪히며 크고 작은 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성주원 특파원)
어느 그릇이 어디로 움직이고 무엇과 부딪힐지 정해져 있지 않다. 충돌할 때마다 새로운 음이 만들어지고, 그 조합 역시 매 순간 달라진다. 아모리는 이를 수백개의 그릇이 우연히 부딪히며 미세하게 다른 음높이의 종소리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합주를 만들어내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부르시에-무주노는 소리가 생성되는 과정 자체를 관람객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했다. 작곡가와 연주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관람자는 우연히 만들어지는 음악의 과정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작품 제목 ‘클리나멘’은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고대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원자가 일정하게 움직이다 어느 순간 예측할 수 없이 미세하게 방향을 트는 ‘일탈(swerve)’을 설명했다. 이 작은 일탈이 원자들의 충돌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통해 결정된 질서 안에서도 우연성과 자유의지가 존재할 여지가 생긴다는 개념이다. 부르시에-무주노는 여기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수조 위에서 그릇들이 떠다니다가 서로 부딪히며 크고 작은 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성주원 특파원)
실제 수조 위의 움직임도 이를 닮았다. 혼자 빠르게 움직이던 그릇이 다른 그릇을 만나 방향을 바꾸고, 여러 개가 한동안 함께 움직이다 다시 흩어진다. 벽에 막혀 멈춰 있던 그릇도 다른 그릇과 충돌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인다. 우연한 만남이 새로운 움직임과 소리를 만들어내는 구조다.
부르시에-무주노는 1997년 클리나멘의 첫 형태를 만들었다. 이후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 등 세계 여러 도시에서 공간에 맞춰 작품을 변형해왔다. 뉴욕에서는 1999년과 2000년 폴라 쿠퍼 갤러리에서 초기 형태가 전시됐다.
그는 이번 아모리 전시에 대해 “드릴홀은 워낙 거대한 공간이어서 관람객들이 실제로 소리의 중심으로 들어가 작품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 일부가 될 수 있다”며 “이 작품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은총과 아름다움의 순간을 나누거나, 더 깊고 내밀한 몽상에 빠져들도록 하는 초대”라고 말했다.
미국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Park Avenue Armory) 입구에 클리나멘(Clinamen) 전시 포스터가 붙어 있다. (사진=이데일리 성주원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