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종로구의 한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 투표 현장에서 만난 40대 발달장애인 진모씨는 투표소 앞에서 입장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렸다. 진씨의 조력자로 동행한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속 오규상(40)씨가 선거 감독관에게 투표 보조를 요청하자 “지침에 따르면 신체가 불편한 분만 투표 보조가 허용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에 오씨는 종로구와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 등에 수차례 전화를 걸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진씨의 사정을 거듭 설명한 끝에 1시간 만에 투표 보조를 허가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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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0일 시민단체가 국가 상대로 제기한 소송 1심 선고 공판에서 “투표 보조 허용 대상에 발달장애인도 포함하라”고 판결했다. 이 때문에 발달장애인들은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투표 보조를 기대했으나 진씨의 사례처럼 현장에선 변화가 없었다. 선관위 관계자는 “부정 투표 우려에 대한 선관위의 입장은 변함이 없어 대법원 확정될 때까지는 지침을 변경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선관위는 그간 발달장애인의 투표 보조을 허용했으나 ‘대리 투표’ 등의 이유로 2020년 치러진 21대 총선부터 지침을 바꾼 바 있다. 투표 보조 허용 범위를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으로 축소한 것이다. 신체적 장애가 없는 발달장애인은 투표 감독관의 판단 아래 현장에서 투표 보조 여부를 허가받아야 한다.
발달장애인들은 지침이 바뀐 이후 현장 감독관의 투표 보조 거부가 빈번해졌다고 말한다. 이날도 오씨는 중앙지법의 1심 판결을 보여주며 감독관에게 투표 보조를 요청했지만 1시간 동안 논쟁을 벌여야 했다. 오씨는 “매 선거마다 조력자로 동행하는데 오늘처럼 1시간 동안 투표 보조를 허용해달라고 요청한 적은 처음이다”며 “투표 마감 1시간 전에 왔으면 투표도 못하고 돌아갈 뻔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12일 서울시교육감 사전투표에서는 은평구 신사동의 투표장에 방문한 한 발달장애인이 후보 이름을 분간하지 못해 어머니의 보조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해 결국 투표하지 못하고 돌아간 사례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장에서 투표를 관리하는 감독관들 역시 이와 관련해 명확한 규정이 없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종로구에서 만난 한 투표소 감독관은 “(투표 보조 허용을) 현장에서 재량껏 판단해야 하니 감독관의 성향에 따라 기준도 달라져 투표에 불편사항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공무원 신분이라는 부담이 있어 보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관악구에 위치한 한 투표소 감독관은 “선관위에서 사전에 감독관들 상대로 교육하긴 하지만 발달장애인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교육하진 않는다”며 “재량 판단의 부담감이 크기 때문에 선관위에서 명확한 가이드를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투표지에 이미지를 넣는 외국 사례를 들며 글을 못 읽는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투표권을 행사할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권선진 평택대 재활상담학과 교수는 “감독관의 재량에 따라 보조를 허용하는 현재 지침으로 불편을 겪는 발달장애인이 다수 발생한다”며 “투표지에 후보의 사진을 첨부하는 대만의 사례처럼 글 못 읽는 발달장애인도 혼자서 후보를 인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대리 투표의 우려 없이도 온전한 투표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