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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증권업계 CEO를 위한 변명

이정훈 기자I 2017.03.22 12:19:00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여기저기 인사 다니고 직원들을 만나고 다니면 1년이 훌쩍 지나가고 또 업무 파악한 뒤 새로운 경영전략을 짜고 나면 1년이 더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서 뭔가 해보려고 하면 임기 만료가 1년 밖에 남지 않아 이미 레임덕이 오고 말죠.” 얼마전 만난 한 증권사 전직 대표이사는 최고경영자(CEO)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실상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렇게 턱없이 부족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10연임이라는 증권사 CEO 최장수 기록을 세운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을 위시해 최근 국내 증권가에도 장수하는 CEO들도 속속 등장하곤 있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증권사 CEO는 속된 말로 여전히 `파리 목숨`이다. 실제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30대그룹 계열 증권사들의 대표이사 평균 임기가 2.7년에 불과하다고 한다. 미국 증권사 CEO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7~8년인데 비해 절반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이다. 특히 CEO로 취임하고서 임기를 1년도 채 안 마치고 퇴직한 CEO도 무려 30%를 넘었다.

국내 증권사들을 보며 다들 주식시장만 목놓고 쳐다보는 `천수답 영업`이라고 비판하곤 하지만 정작 증권사들이 이런 영업행태를 보일 수 밖에 없는 건 이같은 CEO들의 단명(短命)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몇년전 포스코경영연구원이 상장회사 CEO들의 재임기간과 해당 회사의 영업이익률을 비교, 분석한 결과를 봐도 CEO 수명이 길수록 기업 성과도 좋았다. CEO가 20년 이상 재임한 기업들의 5년간 평균 영업이익률은 5.2%였고 10~20년 재임 회사의 이익률은 3.9%, 1~10년 재임 기업의 이익률은 마이너스(-)1.2%였다.

금융당국이 온갖 채찍과 당근을 꺼내도 국내 증권업계에서 `한국판` 골드만삭스나 JP모건이 나오지 않는 건 중장기적 관점에서 진득하게 경영전략을 수립하고 하나씩 이를 이행해 나갈 로이드 블랭크페인이나 제이미 다이먼 같은 사령탑을 두지 못한 탓이 크다. 유상호 사장의 롱런을 빼놓는다면 과거 대형 증권사 축에도 끼지 못했던 동원증권이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한 뒤 오늘날 투자은행(IB)과 자산관리(WM) 등에 비교우위를 점하는 업계 최상위권 증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일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지난 2010년부터 계속 최희문 사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리츠종금증권과 우리투자증권 시절이던 2013년부터 CEO를 맡아왔고 최근 연임에 성공한 김원규 사장이 이끄는 NH투자증권, 2009년부터 변함없이 회사의 성장과 함께 해온 권용원 사장의 키움증권 등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봐도 답은 분명히 나와있는 셈이다.

증권업계는 올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몸집을 키운 대형사들은 초대형IB라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고 중소형사들은 틈새IB나 법인영업 등으로 특화와 전문화의 길을 향해가고 있다. 구체적인 방향성과 그를 향해가는 세부적인 전략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도태될 수 밖에 없다.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고 있는 만큼 CEO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대우증권이라는 공룡을 거액에 사들인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증권산업은 분명 유망산업이다. 증권사 CEO를 하찮게 여기는 인식이 사양산업 인양 보이게 할 뿐이다. 그 인식에 획기적 변화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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