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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피해자인 이기성씨(82)는 지난 1일 천주교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인천 부평구 인천교구노동자센터에서 주최한 ‘7월 평화의시선’ 특강에서 이같이 말했다.
강사로 참여한 이씨는 “원폭 피해를 입고 한 달 정도 있다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방사능 피해 우려로 힘들었다”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씨는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났고 8세 때인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집에서 가족들과 피폭 피해를 입었다. 당시 이씨는 가족들과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씨는 무슨 일인가 싶어 집 밖으로 나갔다. 미국이 오전 8시15분께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 ‘리틀보이’(4.7t)가 터진 것이었다.
이때 이씨는 폭발로 인해 발생한 빛을 보고 놀랐다. 폭탄이 터진 폭심지 방향에서는 버섯 모양의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도 목격됐다. 집은 곧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형, 누나, 어머니가 차례로 집을 빠져나왔고 마지막 아버지가 나오면서 집이 무너졌다. 이씨의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오면서 떨어진 시멘트 돌 등에 엉치뼈를 다쳐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이씨는 다양한 피폭 환자들을 봤다.
이씨는 “병원에는 원폭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며 “일부 어린아이와 어른들은 원자폭탄에서 발생한 열로 옷과 피부가 붙어서 녹아 아래로 흘러내렸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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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뒤늦게 이마 주변에 콩알 같은 물집이 여러 개 생긴 것을 발견했다. 원자폭탄이 터질 때 집 밖에 나갔다가 열에 의해 화상을 입은 것이었다. 어머니의 간병 아래 물집을 터트리고 약을 발라 치료했다. 그러나 이씨의 눈썹은 당시 화상과 함께 타버렸고 다시 나지 않았다.
이씨는 아버지가 병원에서 퇴원한 뒤인 1845년 9월 말께 가족과 함께 아버지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왔고 가야(현재 낙동강 하류지역)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3년 정도 병환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이씨는 1990년대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으로 이주했고 아들 2명, 딸 2명을 키웠다. 그는 “눈썹이 나지 않는 것 외에 큰 질환은 없지만 혹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 피해가 자녀에게 유전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며 “다행히 지금까지 자녀들에게 특별한 질환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미국이 핵무기를 투하해 일본인, 한국인 등 민간인을 학살했다”며 “미국은 여기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가족이 히로시마에 살게 된 것은 일본의 강제 동원 때문이었다”며 “일본도 배상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한국 정부에 대해 “아직까지 히로시마 원폭 피해 한국인에 대한 전수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며 “방사능 피해 검사도 하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피해자에 대한 전수조사를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씨가 속한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일본에서 원폭 피해를 입은 한국인 1세대에게 이뤄지고 있는 지원을 2세대, 3세대에게도 할 수 있게 한국원폭피해자특별법 개정운동을 벌이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원폭 피해자 1세대 2500여명(인천에 30~40명 거주)이 살고 있다.
또 이 협회와 평화운동단체인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은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단체와 함께 핵무기금지조약(2017년 유엔총회 채택) 비준 운동을 하고 있다.
평통사 관계자는 “50개 이상의 나라에서 비준해야 핵무기금지조약이 발효된다”며 “전 세계의 핵무기를 금지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핵무기금지조약 가입 촉구 국제서명운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 1월 기준으로 이 조약을 비준한 나라는 34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