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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임금에 시달리는 일본 소비자들이 가격 인상에 민감한 탓에 기업들이 차마 가격을 올리지 못하기 때문인데,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못한 비용 인상분을 보충하기 위해 기업들이 다시 인건비 인상을 억누르면서 소비 여력은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미국·유럽선 4~6%씩 오르는데 日만 나홀로 0% 상승
2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본 소비자들이 수십년간 저물가에 익숙해지면서 가격 인상에 민감하고, 기업들도 이를 알기 때문에 좀처럼 가격을 올리려 하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한 나라의 경제활동의 총체인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장과 고용, 분배에도 문제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은 전 세계에 불어닥친 인플레 우려에서 한 발짝 비껴나 있다. 미국 10월 소비자물가는 작년 동월보다 6.2% 올라 31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물가 역시 4.1% 급등했다. 반면 일본 9월 소비자물가는 0.1% 오르는 데 그쳤다. 신선식품과 에너지 가격을 제외한 근원 물가는 0.7% 하락했다.
일본에서만 유가나 원자체, 반도체 가격이 안 올라서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선 기업들이 가격을 소비자에게 전가한다면 일본 기업들은 가격을 올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격을 올리는 순간 수요가 급감할 것을 우려한 탓이다. 일본 최대 유통그룹인 이온몰은 올해 말까지 밀가루나 마요네즈, 스파게티 등 식료품 가격을 동결하기로 했다. 이온몰 측은 “소비자들은 생활필수품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저물가 시대 일본 기업들의 생존전략이다. 일본 생활용품 브랜드 무인양품(MUJI)이 7월~11월 약 190개 품목의 가격을 인하한 것이 대표적이다. 무인양품 측은 가격을 내린 직물 제품의 판매가 9월과 10월 늘었다고 밝혔다.
◇물가도, 임금도 안 오르는 악순환 계속돼
문제는 물가가 안 오르는 대신 임금인상도 지지부진하다는 것이다. 이와시타 마리 다이와증권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은 기업이 (인상된) 원자재와 자원 비용을 판매가격에 전가할 수 있고, 빈부격차는 있을지언정 임금은 올라가는 비즈니스 문화가 있다”며 “반면 일본에서는 기업이 인력난을 겪어도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파트타임과 탄력근로제 일자리가 늘긴 했지만 대기업은 여전히 평생직장 개념을 고집하는 등 경직된 채용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비정규직이 정규직 되기 어려운 사회가 되어버린 탓이다. 이 때문에 일본 실업률은 3% 정도로 완전고용 수준을 유지하지만 정작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시달리는 구조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또다시 소비를 줄이게 되고 물가상승률이 제자리걸음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모습이 일본 경제의 현주소다.
일본은행이 8년 만에 행원 기본급을 동결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2% 물가상승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는 입장을 고집하는 일본은행이지만, 정작 직원들 임금을 인상하기는커녕 상여금도 소폭 삭감한 것이다.
다만 일본이 언제까지나 인플레 무풍지대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국제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계속 오르면 일본 기업도 비용 부담을 못 이겨 제품 가격을 인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일본 기업들이 내년 초 제품 가격 인상을 예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블룸버그통신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물가 수치 이면에는 휘발유와 전력 등 일부 주요 품목의 극적인 가격 상승세가 자리잡고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