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을 중심으로 한 전세계적인 디플레이션(D) 공포가 그동안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미국 경제마저 뒤흔들고 있다.
유럽경제의 버팀목이었던 독일이 14일(현지시간) 올해 국내총생산(GDP) 예상 성장률을 지난 2월의 1.8%에서 1.2%로 크게 낮췄다. 내년 성장률 전망치 역시 2.0%에서 1.3%로 내렸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도 GDP 성장률이 정부에서 예상하는 7.5%보다 낮은 7.3~7.4%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D의 공포’는 금융시장을 통해 실물경제로 옮겨지고 있다. 이에 따라 통화정책 정상화의 고삐를 쥐려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기준 금리 인상 시점을 더 늦출 지 모른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美금융시장 강타한 ‘퍼펙트 스톰’
다우존스지수는 15일 뉴욕증시에서 전일대비 1.06% 하락한 1만6141.74로 장을 마쳤고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도 0.81% 떨어진 1862.49를 기록했다. 특히 S&P500지수는 개장 직후 한 때 3% 가까이 떨어지며 지난 2011년 이후 최대 하락폭을 기록하는 등 소규모 순간 폭락(flash crash) 사태까지 연출했다. ‘블랙 먼데이’와 같은 상황을 뜻하는 ‘순간 폭락’은 통상 주가지수가 15초 이내에 0.8% 이상 하락하거나 전체 지수가 10% 이상 급락하는 경우를 지칭한다. 이에 따라 S&P500지수는 직전 고점에서부터 7.96% 하락하고 있고 다우지수는 6.94%, 나스닥지수는 9.19%나 추락하고 있다.
이날 주식시장은 말 그대로 공포(panic) 상태였다. 흔히 ‘공포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의 변동성지수 VIX는 장중 최대 35% 급등하는 등 지난 2011년 11월 이후 3년만에 처음으로 30선 위로 올라섰다.
자산운용사인 보야인베스트먼트는 이를 두고 뉴욕증시에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닥쳤다고 지적했다. 퍼펙트 스톰은 둘 이상 악재가 동시에 발생해 그 영향력이 커지는 현상을 말한다. 보야측은 “달러값 급등과 추락하는 원유가격, 국채금리 하락 등이 맞물려 시장에 대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며 “문제는 이 모든 게 디플레이션을 암시하는 신호이며 이는 유로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반대로 대표 안전자산인 10년만기 미 국채금리는 전일대비 0.06%포인트(6bp) 하락한 2.14%로 장을 마쳤다. 장중 금리는 0.34%포인트(34bp)나 급락하며 1.86%를 기록해 지난해 5월17일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장중 하락폭은 지난 2009년 3월 이후 가장 큰 수준이었다.
애드리언 밀러 GMP증권 채권전략 이사는 “많은 운용사들이 그동안 미 국채를 상대적으로 적게 보유하고 있었는데 최근 글로벌 경기 우려가 커지자 국채 매입을 크게 늘리고 있다”며 채권값은 계속 오르고 주식값은 하락하는 추세가 더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싱가포르 개발은행(DBS)도 연말까지 10년만기 미 국채금리가 지난해 5월 중반 사상 최저인 1.6%를 깨고 내려가 1.5%까지 갈 것으로 점치기도 했다.
◇美경제 ‘빨간 불’..연준, 금리인상 시점 늦출 수도
미국에서도 9월 소매판매가 8개월만에 감소세로 돌아서는 등 경제지표가 악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연준도 일시적으로 긴축기조를 늦추거나 통화정책 정상화에 유연성을 보일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대나 사포타 크레디트스위스 미국경제 리서치담당 이사는 “금융시장에서 경제 성장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연준내 매파(통화긴축 선호)와 비둘기파(통화완화 선호) 등 두 진영이 신중한 관망모드로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이달 28~29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때 연준이 3차 양적완화(QE)를 종료하면서 현재 날짜에 연동하는 형태로 돼 있는 기준금리 인상 가이던스를 경제지표에 의존한다는 방식으로 바꿔 시장 참가자들의 금리 인상 우려를 낮추는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예상했다.
앞서 지난주 공개된 9월 FOMC 의사록에서도 정책위원들은 달러화 강세와 글로벌 경기 부진에 다른 미국 성장률과 인플레이션 하방 위험을 언급하며 연준의 긴축기조 후퇴 가능성을 예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