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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공연 후반부 무대에서 날리는 상당량의 깃털(미세한 입자의 오리털 포함)이 객석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사전 안내를 확인하지 않고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31일까지 LG아트센터)를 관람한다면 공연이 끝날 무렵 당혹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6㎏ 분량의 깃털이 무대 위를 가득 채우는 것은 물론이고 객석까지 날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혹감 속에 펼쳐지는 광경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비극이 정화되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이다.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는 저주에 걸려 백조가 된 오데트와 그런 오데트를 사랑한 지그프리트 왕자의 이야기다. 아일랜드 출신 안무가 겸 연출가 마이클 키간-돌란은 이를 꿈도 희망도 없는 36세 백수 청년의 이야기로 재해석한다. 원작과 같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기대했다면 파격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설정에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기분이 들 것이다. 작품은 동명의 고전발레를 바탕으로 저주에 걸려 백조가 된 아이들이 등장하는 아일랜드 전설 ‘리어의 아이들’, 2000년 아일랜드에서 우울증 병력이 있는 27세 남성이 경찰의 사격으로 사망한 ‘존 카티 사건’을 하나로 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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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 들어서면 황량한 느낌의 무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텅 빈 무대 위에 사다리·종이상자·시멘트 벽돌·검은 비닐 등 차갑고 볼품 없는 도구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무대 가운데에는 팬티 차림의 한 남성이 목에 줄이 묶인 채 무대를 빙빙 돈다. 배우 마이클 머피가 연기하는 이 남성은 염소의 울부짖음처럼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관객을 낯설게 만든다. 공연이 시작되면 옷을 갈아입고 내레이터가 돼 극을 이끈다.
주인공인 36세 백수 청년 지미는 직업도 희망도 없이 우울증에 시달리며 아픈 홀어머니와 변변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집을 정부의 주택 공영화 정책 때문에 잃게 될 위기에 처하자 지미는 자살을 결심하고 호수를 찾는다. 그곳에서 마을 성직자 로트바트의 저주에 걸려 백조가 된 피놀라와 그 동생들을 만난다.
정신질환과 사회적 고립, 음흉한 정치인, 부패한 성직자로 가득 찬 아일랜드의 현실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마이클 키간-돌란이 절망으로 가득한 ‘백조의 호수’를 만든 것은 고전발레 원작의 이야기가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백조의 호수’의 원작 이야기는 ‘흥미롭고 아름다운 동화’로 표현되지만 부분적으로 어둡고 충격적인 비극이다”며 “튀튀와 토슈즈, 피상적인 발레 장비를 걷어내고 나면 오늘날 신문에서 발견되는 이야기와 아주 유사하다”고 말한다.
절망적인 이야기와는 달리 공연 자체는 매우 독특하다. 75분 동안 연극·무용·음악이 한데 뒤섞인다. 2명의 배우와 8명의 무용수, 그리고 3인조 아이리시 밴드 ‘슬로우 무빙 클라우드’가 무대를 함께 꾸민다. 성직자·정치인·경찰 등 1인 5역을 맡은 마이클 머피와 지미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 버나뎃 엘리자벳이 대사 대부분을 소화하며 강렬한 연기를 펼친다. 무용수들의 독특한 몸짓까지 더해져 비극적인 이야기를 기이한 분위기로 만든다.
낭만적으로 끝나는 원작과 달리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는 결말마저도 비극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런데 그 순간 마법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깃털 속에서 관객은 잠시나마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한 줄기 희망과 위로를 찾게 된다. LG아트센터 관계자는 “국내에서 공수한 오리털을 깃털 소품으로 준비했다”며 “재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재활용하며 공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공연이 끝나는 순간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세상을 견뎌낼 힘은 줄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깃털의 먼지를 참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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