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트립in 고상환 여행작가] 늦은 오후 섬등에 도착했다. 마을로 접어드는 길에 그만둔 지 오래되 보이는 점방 앞. 밭일을 끝낸 어머니들이 모여있다. 어쩌면 저 이야기는 수십 년 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핑계로 고된 몸을 잠시 기댈 수 있으니. 늘 이 시간쯤이면 이곳에서. “어머이 더 앉았다 가소!”
△ 그리운 차 꽃피던 시절 ‘섬등’
초록 찻잎이 싱그러운 계절 하동을 걷는다. 하동 하면 생각나는 곳이 여럿이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길을 걸을 생각이다. 첫 목적지는 이름도 예쁜 섬등. 섬등은 악양면 입석리 하덕마을의 다른 이름이다. 예전에는 마을이 섬처럼 동떨어져서 하동사람들은 이곳을 섬등이라 불렀다. 한때 100호가 넘었다지만 지금은 그 반의반쯤만 남은 작은 마을. 섬등이 궁금했던 이유는 골목길갤러리 때문이다.
하덕마을 골목길갤러리의 이름도 섬등이다. 27명의 작가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주민의 오랜 기억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힘든 시절, 자식들 건강하고 배부르게 키우겠다는 소망, 허리 굽은 어머이들의 고운 미소. 작가들은 이들을 모두 잔잔한 그림으로 토해냈다. 마을 사람들 모두 남은 인생이 언제나 차 꽃피던 날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며.
이장님 댁 벽에 마을을 그린 ‘섬등’을 시작으로 골목마다 담마다 꽃이 피고 차 향이 우러난다. 좁은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꽃이 피고 커다란 찻잔이 새겨진다. 어디 어디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큼지막한 날개도 없지만 따듯한 정이 느껴지는 골목길갤러리에 오래 머물고 싶다. 이 골목에서 아무도 몰래 지나버린 점방 앞 그녀들의 곱디고운 차 꽃피던 시절을 마주할지도 모를 일이다.
△ 상춘우전향 ‘매암다방’
섬등을 나와 악양면사무소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약 15분 남짓 한적한 길을 걸어 악양파출소를 지나면 오른쪽이 매암 다방이다. 차를 마시러 왔으니 다방이라 부르지만, 대규모 다원과 차문화박물관까지 갖췄다. 하지만 다원보다는 다방이 친근하고 또 이곳의 차 마시는 공간에 ‘매암다방’이라는 현판이 붙었으니 계속 다방이라 부르겠다.
아담한 다방건물이 인상적이다. 세작과 우전으로 만든 홍차가 가득 담겨있으니 마음에 드는 차를 골라 직접 우린다. 찻잔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매암다원의 고즈넉한 풍경과 구수한 우전의 향이 어우러지니 이 순간 만큼은 더 부러울 것이 없다. 편한 의자 하나 골라 하루 종일 머물고 싶은 곳이다. 차값으로 한 사람당 3천원을 차값 통에 넣으면 된다.
<여행 INFO>
걷는 구간: 3km (섬등과 매암다방 탐방 포함, 난이도 : 하)
소요시간: 도보 1시간 소요
여행 시작 지점: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입석리 하덕마을
여행 종료 지점: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293 매암다방
대중교통: 화개 정류소에서 악양 방면 버스 이용. 하덕마을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