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안정적인 재원확보 방안으로 관심이 쏠렸던 지하경제 양성화와 ‘역외 탈세 근절’이 1년 반이 넘도록 헛바퀴만 돌고 있다.
역외 탈세 근절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다. 자칫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역외 탈세는 국내 거주자가 국내 소득을 국외로 이전하거나, 국외소득을 국내로 환수하지 않고 조세회피처 등에 나누고 국내 과세를 회피하는 것을 일컫는다.
9일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등에 따르면 경기회복에 대한 우려로 경제정책 방향이 내수 활성화와 민생경제 살리기에 방점이 찍히면서 역외 탈세 근절은 뒷순위로 밀리고 있다.
◇ 동력 잃은 ‘역외 탈세 근절’..“지속적인 세수효과 기대 어려워”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증세 대신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재원을 확보, 복지 등 공약을 실천하겠다며 역외 탈세 근절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러나 기업과 자영업자들의 반발 속에 대책 추진은 지지부진했고, 급기야 지난 4월 발생한 ‘세월호 참사’로 잊힌 정책이 돼 버렸다.
역외 탈세 근절 등 지하경제 양성화가 추진력을 잃고 있다는 것은 지난 1일 국회 예산정책처가 발표한 ‘2013년도 총수입 실적’ 보고서에도 잘 나타난다. 보고서를 보면 정부는 지난해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3조1000억원의 세금을 징수했다. 정부가 애초 제시한 목표액 2조7000억원보다 4000억원 많다. 그러나 예산정책처는 지하경제 양성화에 따른 세수효과는 2013년 세입보전대책의 하나로 세무조사 등 징세행정을 강화한 결과로 해석된다며 앞으로 지속적인 세수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 ‘자진신고’ 역외 탈세 근절에 한계
역외 탈세 적발이 쉽지 않다는 점도 난제다. 납세자의 자발적 신고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역외 탈세 추징세액은 1조789억원으로 2009년 1801억원보다 6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역외 탈세를 뿌리 뽑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국세청 관계자도 “국외소득은 국내소득과 달리 납세자가 자발적으로 신고하지 않으면 정보를 확보하기 어렵다”며 “역외 탈세를 적발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역외 탈세 방지책이 자진신고를 유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날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주최로 열린 ‘역외 탈세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 방안’ 공청회도 이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안종석 조세재정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영국, 벨기에 등을 보면, 역외재산·소득을 자진 신고하면 가산세·과태료를 감면하고, 조세범 고발을 면제하는 방안을 추진했다”며 “국내에도 기한 후 신고하더라도 과태료 감면율을 높게 적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자진신고를 하지 않은 역외탈세자에게는 적발 때 처벌을 더 무겁게 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가산세를 많이 물리고, 역외 탈세 공소시효인 부과제척 기간도 국내 탈세보다 연장토록 하자는 내용이다. 안 연구위원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국외원천소득 부과제척 기간은 각각 12년, 20년이지만 국내는 국세의 경우 무신고 7년, 사기·기타 부정행위 10년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정당한 거래 입증책임 납세자에게 물어야”
해외소득의 자진신고만으로 역외 탈세를 근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절세와 탈세의 경계선이 모호해 적발 자체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법률을 위반하지 않는 이상 조세회피는 일종의 절세 전략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과세당국이 탈세라고 판단했지만, 재판에서 탈세가 아닌 것으로 판결이 나는 예도 있고, 조세회피 행위가 적발되더라도 적게 낸 세금만 추징될 뿐 형사처벌은 안 된다.
일각에서는 조세피난처를 통한 거래 정당성에 대한 입증 책임을 과세당국이 아닌 납세자에게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역외 탈세를 입증하기 위해선 과세당국이 직접 위법 사실을 찾아내야 하지만, 제한된 정보를 통해 이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며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경우 정당한 거래라는 입증책임을 납세자가 지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역외 탈세에 대한 처벌을 더 엄격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유찬 홍익대 경영대학원 세무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역외 탈세는 벌금형에 그칠 뿐 실제로 징역형 등 중징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다”며 “역외 탈세는 명백한 범죄행위로, 형사처벌 대상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역외 탈세 추징세액과는 별도로 실제 징수율을 높이는 과제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