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년째 보험회사 콜센터 상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전영진(45)씨는 7일 아침에도 ‘콜 공장’으로 출근한다. 쉴 틈 없이 전화가 연결되는 콜센터 사무실에서 남성은 상담원 760명 중 단 1명이다. 여성이 많은 이곳에서 전씨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통화 상대방과 상사의 폭언이다. 전씨는 “‘XX, 또 전화 돌리느냐’며 욕을 듣는 게 일상”이라며 “다시 욕하면 상담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시간을 끌면서 비아냥거려서 계속 듣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씨의 동료들 역시 폭언과 괴롭힘에 시달려도 전화를 끊지 못했다. 통화가 길어지면 매일 할당된 통화량 90통을 못 채우고, 임금이 깎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등급으로 매겨지는 실적은 매일 모두에게 공개됐다. 실적이 떨어지면 상사가 ‘전화 안 받고 거저 먹으려 하느냐’, ‘고객에게 알랑거려라’, ‘네 영혼을 팔라’며 독촉해서 일부 상담사는 점심시간과 화장실을 갈 시간까지 쪼개 전화를 받았다.
지난해 민주노총이 콜센터 직원 1278명을 상대로 진행한 ‘콜센터노동자 건강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콜센터 상담원들이 방광염과 성대결절, 정신질환에 걸린 비율은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영양조사’와 고용노동부의 ‘근로환경조사’의 평균보다 최소 10배 이상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15년 차 상담원 오현화(47)씨는 “통화 시작 전 산업안전보건법상 욕을 하면 안된다는 안내가 없는 곳도 많다”며 “회사 지침에 전화를 끊을 수 있다는 말이 없고, 관리자도 허락하지 않아서 악성민원인을 만나도 피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신명희(55)씨는 서울 성북구의 한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동료 5명과 함께 매일 급식 760인분을 짓는다. 재료를 다듬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신씨는 넘어질세라 늘 긴장한다. 그는 바닥의 물을 밟고 미끄러져서 2년 전 무릎을, 지난해에는 허리 수술을 받았다. 아무리 덥고 힘들어도 장갑과 마스크는 꼭 착용해야 한다. 급식실에서는 식기 소독기와 기름, 각종 화기가 많아 화상을 입기 쉽다. 구이나 튀김요리를 만들 때 생기는 유독 증기(조리흄)을 들이마시면 호흡기 질환이 생길 수 있다.
충북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는 조리 실무사 박명숙(56)씨는 3시간 동안 계란 1500개를 부치다가 쓰러진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말했다. 가스 불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를 계속 들이마신 탓이었다. 박씨는 “환풍기가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며 “볶음이나 튀김요리는 매주 1~2회 정도 하라는 교육부의 방침은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급식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1.7%가 폐 CT 검진을 받았고, 10%는 일터에서 화상을, 3명 중 1명(33.5%)은 골절이나 인대 파열 등의 부상을 입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女 승무원은 매니큐어 필수?…성희롱 승객도 여전
외모관리는 출근 전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또 다른 노동이다. 12년째 항공사 승무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시은(35)씨는 “승무원들은 지금도 비행안전에 절대 필요하지 않은 꾸밈노동을 해야 한다”며 “매니큐어는 반드시 발라야 하고 피부도 투명하게 화장하라는 등 외모 관련 사내 규정이 많다”고 말했다. 박씨는 “외모평가 외에도 승객이 엉덩이를 만지거나 소리치며 폭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감정노동자 보호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여성 노동자를 보호할 제도와 규범이 사회에 정착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산업안전보건법에 휴게시간이나 휴식공간, 보호조치 등이 있어도 면적이나 시간 등 구체적인 방법이 명시되지 않은 사례가 많다”며 “형식적으로 시설을 만들어놔서 노동자를 보호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저출산으로 모두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여성이 일하기 힘든 환경에서는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국회와 정부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노동시장에서 주변화된 여성을 보호할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