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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데일리 안승찬 특파원] “아예 회사 문 닫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재미 기업가 A씨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름도 생소한 국경조정세(border adjustment tax)를 도입한다는 소리를 듣고서다. 자리에 있던 누군가는 “이건 미국 우선주의가 아니라 미국만 살겠다는 거 아니냐”고 했다. 다들 한숨을 푹푹 쉬었다.
트럼프 정부가 도입을 추진하는 국경조정세를 관세하고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국경조정세는 관세가 아닌 법인세의 일종이다. 국경을 넘은 물건에 직접 붙는 관세와 달리 국경조정세는 물건이 아닌 기업에 매기는 세금이라는 뜻이다. 법인세는 법인세인데 관세처럼 국경의 의미를 집어넣었다는 점에서 ‘국경조정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국도 우리나라도 법인세엔 국경의 개념이 없었다. 수출해서 돈을 벌었건 그 나라 안에서 돈을 벌었건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에 따라 세금을 낼 뿐이다. 그런데 국경조정세는 미국 내에서 팔았느냐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팔았느냐에 따라 법인세 부과여부가 결정된다. 미국내에서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번 기업에는 과세하고 반대로 미국 국경을 넘어 해외에서 판매해 돈을 번 기업에겐 세금을 완전히 면제해주는 파격적인 조세제도다. 미국 수출기업이 환호성을 지를 만한 일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눈 밖에 난 수입업체는 세금 폭탄을 맞는다. 국경조정세가 수입품 원가에 대한 공제 혜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A기업이 한국에서 700달러 어치 물건을 수입해 판관비 100달러를 들여 미국에서 총 1000달러 어치를 팔았다고 해보자. 세전수익은 200달러(1000-700-100)이고 이 200달러에 법인세율(35%)를 곱한 70달러를 부과하는 게 현행 법인세 계산식이다. 그런데 국경조정세가 도입되면 셈법이 달라진다. 수입품에 대한 원가공제가 사라져 ‘(1000-700-100=200) X 법인세율’이 아닌 ‘(1000-100=900) X 법인세율’이 된다. 법인세율을 35%에서 20%로 낮춰주더라도 결국 900달러에 법인세율(20%)을 곱한 180달러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수입 기업은 지금보다 세금이 몇배로 뛴다. ‘회사 문 닫으라는 거냐’란 하소연이 공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져도 트럼프 정부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한국을 비롯한 150개의 나라가 자국 내에서 판매하는 제품엔 부가가치세를 매기고 수출품은 부가가치세를 환급해주는데, 이게 수출 보조금 아니고 뭐냐고 주장한다. 부가가치세가 없는 미국은 ‘우리도 비슷한 거 만들어 수출기업 지원하겠다는데 아니꼽냐’고 항변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함정이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부가가치세 같은 간접세는 국경 조정을 허용하지만 법인세 같은 직접세엔 국경 조정 개념 적용을 금지하고 있다. 명백한 WTO 규정 위반이다.
트럼프 정부가 기상천외한 국경조정세를 들고 나온 뒤엔 미국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겠다는 꼼수가 깔렸다. 특정 국가에 관세를 매기거나 부가가치세를 매기면 수입품에 직접 세금이 붙는다. 세금을 내는 주체가 미국 국민이 된다는 뜻이다. 감세를 신줏단지 모시듯 여기는 공화당과 트럼프 대통령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그런데 국경조정세는 법인세 형태를 띠고 있어서 세금을 내는 주체가 소비자가 아니라 기업이다. 결과적으론 둘 다 수입품의 가격 상승을 유발하지만 형식적으론 한 쿠션 돌아 들어간다. 겉으로 감세처럼 보이려는 속셈이다. 게임의 룰이 바뀌면 승자와 패자가 달라진다. 미국 국경조정세 도입은 환율과 수출의 판을 바꾼다. 우리는 새로운 게임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