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시온 인턴기자] 대학생 A씨는 지난해 말 방을 빼기 위해 부동산 중개인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본가에 내려가 있는 기간 동안 방을 보여줘야 한다며 중개인이 알려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온 후 집에서 자고 있던 중 갑자기 비밀번호를 누르고 다짜고짜 중개인이 들어와 깜짝 놀랐다. 방을 보러 가겠다는 연락에 답장이 없자 바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A씨는 “만일 씻고 나온 상황이었다면 어쩔 뻔했느냐”며 따졌지만 중개인은 손님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대학생 B씨는 올해 초 계약 만료 전 부동산에 계약 연장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이후 B씨가 외출한 상황에서 집을 보러 가도 되냐며 중개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외출 중이라 어렵다고 하자 중개인은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귀중품도 많고 아무도 없는 집에 외부인이 들락날락하는 게 내키지 않아 거절했지만 중개인은 “집을 내놓을 생각이 있는 거냐”며 비밀번호를 계속 요구했다.
직장인 C씨는 계약 기간보다 몇 달 빠르게 방을 부동산에 내놨다. 방이 빨리 나가려면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게 좋다는 중개인의 말에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방문 전에 꼭 연락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집에 있는 상태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 ‘누구세요’라고 하려는 순간 바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누군가 들어왔다. 집에 들어온 사람은 중개인과 동행하지 않은 남자 손님 두 명이었다. 중개인이 손님에게 종이에 비밀번호를 써서 알려준 것이다.
“1인 가구는 비밀번호 알려주는 것이 관례”
부동산에 원룸을 내놓으면 부동산 중개인들이 집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세입자가 부재중이더라도 방을 보여줄 수 있어 다음 세입자를 빠르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관악구의 한 부동산 중개인은 “일반적으로 한 달 전에는 계약이 체결돼야 새로운 세입자가 전세 대출 등을 여유 있게 할 수 있다”며 “세입자들도 방이 빨리 나가길 원하기 때문에 대부분 비밀번호를 알려준다”라고 말했다.
이 중개인은 “대부분 채광 등을 확인하기 위해 낮에 방을 보러 온다”며 “특히 대학생 1인 가구의 경우 낮에 거의 부재중이기 때문에 비밀번호를 모르면 방을 거의 못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전 약속 없이 당일에 부동산에 방문해 방을 보여달라는 손님이 꽤 많아 1인 가구의 경우 기한이 촉박하면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이 관례“라고 말했다.
이 중개인은 ”방을 악의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려는 세입자도 간혹 있다“며 ”계약서에 집을 보여주는 것을 이유 없이 거절하거나 해당 사유로 발생한 계약 지연에 대한 책임은 세입자가 진다는 특약을 넣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중개인 믿고 알려줬지만...“답장 없자 대뜸 찾아온 적도”
다만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경우 보통 방문 전에 미리 세입자에게 연락을 하고 일정을 협의해 방문하는 것이 관례다.
직장인 유가은(24)씨는 보통 최소 1~2시간 전에는 방을 보러 가도 되냐며 연락을 해준다“며 ”비밀번호가 유출될까 찝찝한 것은 사실이지만 방을 빨리 빼야 하는 입장에서 중개인을 믿고 알려줄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대학생 최 모씨(23)는 ”낮에 거의 학교를 가거나 알바를 해 집에 없어서 비밀번호를 어쩔 수 없이 알려줬다가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당황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크를 했는데 반응이 없어서 들어왔다며 중개인이 미안하다고 하긴 했지만 노크에 반응할 새도 없이 바로 문을 열었었다“라고 말했다.
직장인 이 모씨(27)는 ”날이 더워 속옷만 입은 채로 자고 있는데 갑자기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중개인과 손님이 들어왔다가 급하게 다시 나갔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부동산 중개인은 ‘집을 보러 간다고 전화랑 문자를 남겼는데 답장이 없어 들어갔다. 죄송하다’며 ‘ 세탁실에 잠시 들어가 계시면 금방 보여드리고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씨는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들어온 것이 화가 난다“며 ”모든 부동산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언제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 불안하다“라고 말했다.
주거침입죄 적용 가능할까
그러나 이런 중개인의 행위에 주거침입죄가 당연히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주거침입죄란 ‘사람이 주거·관리하는 건조물, 선박, 항공기 또는 점유하는 방실에 침입하거나, 이러한 장소에서 퇴거의 요구를 받고도 응하지 않는 범죄(형법 제319조)’다.
주거침입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주거권을 침해하려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법무법인 해우의 박진세 변호사는 통화에서 “비밀번호를 알려줬다는 것은 필요할 때 방문해서 방을 보여줘도 된다는 암묵적인 의사표시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현실적으로 혐의 입증이 쉽지 않다”리고 말했다.
김재홍 공인중개사는 통화에서 “부동산 중개인은 손님에게 방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명확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실질적인 처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라고 말했다.
다만 “중개인의 해당 행위가 지나치게 상습적이거나 사전 연락을 아예 하지 않고 방문한 경우, 집에 세입자가 있는지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경우 등에는 그 위법성이 과도하다고 판단해 혐의가 인정되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도 “사전 연락을 반드시 해달라거나 내부에 사람이 있는지 꼭 확인하고 출입하라는 등의 출입 방법을 세입자와 중개인이 합의하고 세입자가 이를 녹취 등으로 남긴 경우 혐의 인정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주거침입죄가 성립한 경우 최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부동산 중개인의 경우 위법성이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아 대부분 벌금형이 선고된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사전 연락 등 출입 방법에 대한 합의를 녹취 등으로 남겨놓으면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최대한 자주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중개인의 연락이 오면 비밀번호를 알려준다거나 가정용 내부 CCTV를 설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