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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워싱턴에 가다(간담회 발언록)

조선일보 기자I 2003.11.03 20:25:20
[조선일보 제공] “하고 싶은 말은 태산같이 많으나 짧은 시간 내에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2일 미국 워싱턴의 한 한국식당에서 열린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지난 일주일 동안 워싱턴에서 내내 한 고민이었을지도 모른다. 황 전 비서는 지난 10월27일 워싱턴에 도착해 강연과 미 행정부와 의원 면담, 각종 만찬 등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일주일 동안 강행군을 해왔다. 그는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는 매우 피곤해 보였으나, 일단 말을 시작하자 강단있는 작은 체구에서 놀라운 기운이 솟아나왔다. 다음은 특파원 간담회에서 했던 황 전 비서의 발언을 정리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이 김정일 정권의 생명 연장에 기여했다고 보는가. “한국에 온지도 6년이 넘어 어언 7년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른다. 북한에 대해서는 늘 관심을 갖고 있지만, 한국의 현 정치에 대한 연구는 별로 하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누군가 나에게 한국을 아는 데 5년이 걸릴 것이라고 하기에, 너무 사람을 깔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6년이 된 지금도 나는 아직 (한국에 대한 이해수준에서) 유치원생이다. 정부 정책을 평가할 식견은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변화와 관련하여. “나도 나름대로 북한의 변화를 희망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소떼를 북한에 몰고 갔을 때도, 금강산 관광길이 열렸을 때도, 다들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변했다는 것인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변화란,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데 있어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북한의 본질적인 변화란 독재제도의 제거다. 독재 그 자체가 복잡하고 많은 것을 포함한다. 수령 절대주의적 독재를 배제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되는 일이 아니다.” 북한의 개혁에 대하여 “(북한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교류의 장이 필요하다. 예전에 동구를 돌아보면서 그중 가장 독재가 심하다는 루마니아에 가봤는데, 북한(독재)의 10분의 일도 안된다.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추대될 때, 원래는 지방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여 성대하게 치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방 사람들 모아놓으면 서로 말을 전한다. 그 지역에서는 몇 명이나 굶어죽었느냐고 서로 물어보지 않겠는가. 그래서 못했다. 미국에서 북한에 삐라를 뿌리고 방송을 한다고 하는데, 다 시기상조다. 본격적인 효과를 거두려면 사람들의 이동과 교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제한된 개혁을 하는 것은 독재체제 유지 강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독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필수적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한된 개혁이 당장 독재를 허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과,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도 시장은 있었다. 너무 가난하면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작농 부양책들이 나왔었다. 소규모 자영업자의 배양은 독재에 도움이 되고, 김정일도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김정일도 초기에는 독재만 강화하려고 했지만, (경제)위기를 겪고 보니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통일에 대하여 “통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서두르지 말자는 의견도 있더라. 통일도 하기 전에 비용걱정은 왜 하는가. 독재만 붕괴되면, 통일 비용은 별 게 아니다. 내가 아는 한에는 몇해 동안 양곡 200만t을 무상으로 주면 된다. 그것은 한국경제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본과 기술이 마음대로 들어가고, 교류협력을 결정적으로 강화하면 된다.” “북한의 현 정권이 바뀌고 민주적 원칙에서 평화통일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민주정권이 서야 한다. 가능하다. 그 다음에 연방제를 할지 어떨지 결정해야 하고, 그때야말로 민족적 단결이 중요하다.독재가 무너지면 나는 돌아간다.” “북한의 로켓을 생산하는 한 공장에서 전기가 합선되면서 로켓이 하나씩 터지기 시작해 글자 그대로 도시 하나가 날아갔다.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났는 줄 알았다. 억압받던 사람들이 도끼를 들고 나섰다. 그러나 나중에 전쟁이 아닌 것이 밝혀지고, 그 사람들은 무진 고생을 했다. 통일하자는 사람이 절대다수이고, 남북한은 천당과 지옥처럼 차이가 나는데, 누가 반대하며, 반대가 가능하겠는가.” (중국 등 주변국의 영향에 대해) “중국을 왜 그렇게 호랑이처럼 무서워하나. 중국사람들이 들어도 좋아하지 않겠다. 중국이 뭐 우리나라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가. 그렇게 어려운 조건에서 민주정권을 세우고 민주적 통일 가능성이 있다면 거기서 다시 다른 나라의 위협을 느낄 이유가 있는가.” 군부와 군대 “김정일 체제가 무너지면 더 강경파가 나와서 집권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정일보다 더 강경파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군부라고 한다. 북한에 김정일보다 더 강경파가 어디 있는가. 김정일은 군부를 어린애 다루듯 한다. 군대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일 자유로운 활동 가능성이 생기게 되면 제일 먼저 반체제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대상은 바로 군부다. 모든 압제 제도가 무너질 때 누가 앞장서겠느냐. 가장 희생이 많은 사람들이다. 북한독재체제 하에서 제일 희생을 많이 당한 사람들은 군대다. 우두머리 몇 명은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나 청년들은 한창 공부하고 꽃피어야 할 때 13년 동안 군대에 나가서 김정일을 위해서 총과 폭탄이 되는 연습만 강요당하다 제대하면 집단적으로 광산, 탄광에 보내 집단생활을 하게 한다. 사람의 일생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 이보다 더 가혹한 인권 유린은 없다. 북한 군대에서는 중대, 소대 규모의 소집단들의 반란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으며 이들은 다 희생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용감하고 무기도 쓸 수있는 조직은 군대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면 김정일 독재의 유지를 보장해 주겠다는 일부 세력의 태도는 매우 비민주적이다’는 발언의 의미. “그것은 미국정부의 정책이 옳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6자회담이니 5자회담이니 하는 것은 정치적인 형식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원칙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은 주권재민이다. 나라의 주인은 인민이다. 인민이 주인역할을 못하고 억압받을 때 도와주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뭔가를 양보하면 독재를 유지해주겠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격분한다. 독재를 보장하면 안된다.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뭘 좀 양보하면 독재를 유지해도 좋다고 하는 것은, 그렇다면 북한인민은 독재를 받아도 좋다는 것인가. 그게 무슨 민주주의 원칙인가. 나는 그 원칙에 대해 말한 것이다. 내가 뭔가 발언하면 이렇게 말했다는 식으로 딱지를 붙이는데, 민주주의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딱지를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가.”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평가 “사람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우선 객관적인 업적이다. 그 다음이 사상이다. 얼마나 이기주의가 강한가, 얼마나 사회를 위해 봉사했는가를 봐야 한다. 김일성은 본질적으로 스탈린주의자로,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통치한 집단 이기주의를 보였다. 그러나 객관적인 성과 면에서 인민을 굶어죽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수령만 중시하는 절대적 이기주의다. 인민을 굶기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었다. 김정일은 인민을 위한 지도자는 아니지만, 독재자로서는 탁월하다.” 지식인이란?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지식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 생기면, 이 사람은 뭐라고 하고, 저 사람은 뭐라고 하고, 중립을 취하며 어느 쪽 입장도 취하지 않는 것을 지식인의 의무로 착각한다.” 역사와 선택 “역사는 새 것과 낡은 것의 교체이며, 계속성과 혁신성의 교체이다. 상대적으로 좋으며 현실적으로 좋은 것이 그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 수 있다.” 황씨의 방미 전, 장남이 아오지 탄광에서 다리골절상을 입어 평양으로 옮겨졌던 사실이 밝혀졌다는 보도와 관련, 이 `사고"가 미국을 방문한 황씨에 대한 협박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 “나는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이, 가족보다는 조국이, 조국보다는 인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족을 버리고 북한을 떠날 때 이미 각오를 한 것이고, 김정일은 가족문제로 내 마음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그렇게 졸렬하지는 않다.” 주사파 학생들에 대해 “그들은 주체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나의 방미를 결사반대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 그 귀중한 목숨을 나에게 거나 안타까웠다. 내가 돌아가면 그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 못만나게 하니까 문제다. 나는 아무리 비방 중상을 당해도 반박할 수가 없으니, 나에 대한 공격은 필승불패다. 그러나 짧은 시간 만나면 오히려 오해만 산다. 길게 이야기해야 한다. 돌아가면 많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자유롭게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만날 수 있다.” 신세대와 구세대, 그리고 세대 교체 “김일성과 김정일은 새 세대를 위한 교양에 힘을 쏟았다. 모든 것을 조직화하는 북한에서 당조직 다음 가는 것이 청년조직이었다. 청년조직의 권한이 당당했다. 어릴 때부터 개인숭배 교육을 받은 새 세대는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보면 구세대보다 더 모른다. 지난번 대구에서 북한 젊은이들이 비맞는 김정일 초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끌어내렸다. 낡은 세대는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세대교체라는 말을 쓰는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김용순 북한 노동당 대남비서 사망에 대해. “남 죽은 것을 좋다고 할 수는 없고... 북한 독재유지에 김정일만한 사람이 없다. 김용순은 ‘옳소주의자’다. 그러나 노래와 술과 춤은 잘한다. 김용순 없이는 술 파티를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일에 대한 타격이라면 타격이다.” 미국 행정부 인사와 의원들의 주요관심사. “북한에 핵무기가 있나 없나였다.” 미국방문 소감과 평가 “뉴욕에서 곧장 워싱턴으로 와서 뉴욕을 보지도 못했다. 영화 한편 본 것만도 못하다. 그러나 워싱턴에 와보니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은 든다. 이번 방미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 보자. 그러나 성과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올 때부터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실수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왔다.” ◆ “열심히 투쟁합시다.” 황 전 비서는 1시간 30분에 걸친 간담회 동안 식사를 전혀 하지 않고 녹차만 몇모금 마셨다. 뼈가 굵고 잔병도 없는 건강한 체질이라고 한다. 가끔 요리를 한다는데, 어떤 요리를 할 줄 아느냐는 질문에는 ‘비밀’이라며 웃기만 했다. 간담회는 무서운 노교수의 강의처럼 빡빡했다. 10월31일 황씨는 자신을 초청한 단체인 비정부기구 디펜스포럼이 주최한 ‘미국이 북한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 것(What America Needs to Know About North Korea)’이라는 제목의 오찬 강연회를 했다. 의회 레이번 빌딩에서 열린 이날 강연회에는, 워싱턴에서 북한 관련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은 거의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한 한국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 의회에서 열린 행사중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행사는 없었을 겁니다. 아마 다들 새로운 정보를 가져올 거라고 기대해서가 아니라 황씨의 말을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왔을 겁니다. 그러니까 워싱턴에서 황씨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알 수 있는 거지요.” 강연에서도,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무언가 끊임없이 전달하고 싶어하고, 동시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 대해서, 북한의 현실에 대해서 잘 전달되지 않아 대단히 답답해 하는 듯 했다. 그는 큰 원칙에 대해서, 기본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어했다. 그는 “열심히 투쟁합시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숙소로 향했다. 그가 미국방문 동안 쏟아낸 말들이 어떤 메아리를 불러올 것인지는 서서히 들려올 것이다. (워싱턴=강인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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