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넷플릭스처럼 편하게 앉아서 다양한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게 된 시대에 연극을 관람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 됐다. 그러나 연극은 관객과 아티스트의 공감대를 통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험을 줄 수 있다.”
27일 서울 중구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기자들과 만난 캐나다 출신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62)는 지금 시대에 연극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치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연극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커뮤니케이션, communication)을 넘어 공감대(커뮤니언, communion)가 돼야 한다”며 “관객이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예술가라는 또 다른 공동체와 함께 여러 경험을 나누는 특별한 경험이 연극이다”라고 강조했다.
르빠주는 태양의서커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과 작업하며 혁신적인 무대 기술과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현대 연극의 경계를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아온 세계적인 연출가다. 국내에도 그동안 ‘달의 저편’ ‘안데르센 프로젝트’ ‘바늘과 아편’ 등의 작품이 소개됐다.
올해는 신작 연극 ‘887’(5월 29일~6월 2일 LG아트센터)로 국내 관객과 만난다. 특히 이번 공연은 르빠주가 직접 배우로 출연하는 1인극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르빠주의 한국 방문은 12년 만이며 배우로 한국 무대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887’은 르빠주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60년대 캐나다 퀘벡 시티 머레이가 887번지에 있는 작은 아파트 건물을 무대로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다. 르빠주는 “‘887’은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는 작품”이라며 “우리의 뇌가 기억을 위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기억하고 왜 기억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
르빠주가 기억이라는 문제를 꺼낸 것은 “연극은 사람의 기억을 담아내는 예술”이라는 믿음에서다. 그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배우에게 기억은 큰 주제가 된다”며 “대사를 외우는 것도 그렇지만 연극과 기억, 기술은 가깝게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작품은 기억과 함께 역사의 문제도 함께 다룬다. 르빠주에게 60년대는 가족들과 함께 유년기를 보낸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인 동시에 캐나다의 격동기를 겪어낸 거대한 역사다. 당시 캐나다는 계급 갈등 속에서 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르빠주는 “60년대 캐나다에서는 관리자는 영어를 사용하는 반면 노동자는 프랑스어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며 “나의 아버지도 그 당시 택시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번 작품은 ‘미니 테크놀로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어릴 적 살았던 아파트 건물을 미니어처 형식으로 무대 위에 재현해 선보인다. 아기자기한 모형, 낡은 상자 속에 묵혀 있던 옛날 사진과 신문 이미지 등이 생동감과 친밀감을 선사한다. 르빠주는 “무대 세트 등을 구현하기 위해 ‘하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했지만 공연은 마치 인형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르빠주가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연극을 선보이는 것은 “연극은 연기뿐만 아니라 무용·문학·음악 등 여러 가지 예술적 형태를 포함하고 있는 모태 예술로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르빠주 자신은 새로운 기술에 대해 무지하지만 대신 주변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려고 늘 열린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887’을 통해 르빠주는 “지금의 시대가 기억을 망각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과거 수많은 갈등 속에서 전쟁과 재앙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지금 많은 이들이 같은 실수와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며 “이런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 예술이 해야 할 역할이다”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