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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1921년 3월 한인 무장세력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됐고 ‘대한독립단’으로 개편된 후 군사고문으로 추대됐다. 같은 해 6월 하순 홍범도·안무 등의 부대와 함께 장군 휘하 부대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됐는데, 장군은 이 부대의 주요 간부 직책을 맡았다.
1925년에는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다. 1928년에는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부(府) 통합운동에 노력했다.
193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해 중국의용군과 합세해 주로 하얼빈(哈爾濱) 부근의 북만주 일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했다. 특히 1933년 6월 30일 중국 연변의 나자구에서 조선 회령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기습해 거둔 대전자대첩이 유명하다.
1938년 임시정부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군무부장을 겸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건돼 장군은 총사령에 취임해 해방 직후까지 한국광복군을 총지휘했다. 환국할 때까지 중국대륙에서 중국·미국 등과 힘을 합쳐 일제 타도와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 정계에서 활약하던 장군은 1957년 1월 15일 69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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