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에서는 HDi 디젤 엔진과 MPC로 대표되는 효율성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고 세계 모터스포츠 무대에서는 WRC, 다카르 랠리 그리고 내구레이스 등에서 맹활약하며 그 기술을 과시해왔다. 최근 푸조는 크로스오버 카테고리의 다양화와 새로운 Blue HDi 엔진 등을 제시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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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그리고 그 이상의 역사를 가진 푸조
자동차 메이커로서 푸조의 시작은 18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9년 증기기관 차량 전문가인 레옹 세르폴레(Leon Serpollet)와 함께 푸조의 첫 번째 자동차 ‘세르폴레 푸조(Serpollet-Peugeot)’를 발표하며 자동차 산업의 시작을 알렸다. 이때부터 푸조는 한 세기가 넘는 자동차 메이커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시간으로만 본다면 푸조의 역사는 전세계 자동차 메이커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보유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푸조의 진정한 역사는 더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푸조의 역사는 바로 1810년, 첫 시작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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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 가문, 혼란 속에서 두 세기의 역사를 시작하다
코르시카 출신의 포병 소위로 프랑스 공화국에 임관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혁명, 툴롱 공성전 등 숱한 전장에서 왕당파를 압도하는 뛰어난 전술과 혁혁한 성과를 바탕으로 시대의 영웅에 올랐다. 이러한 공로에 프랑스 대혁명 말기, 프랑스 원로원은 1799년 쿠데타를 이끌고 공화국 1통령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황제로 추대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제국은 유럽을 지배하기 위한 전쟁을 펼쳤고,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이 무렵 푸조 역시 세상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1734년 출생의 사업가 장 피에르 푸조(Jean Pierre Ier Peugeot)는 한 평생 다양한 산업 분야에 투자와 사업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다. 실제로 그는 직물과 염료, 섬유 및 곡물 관련 정곡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프랑스의 주요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지배하고 유럽 전역에 프랑스의 영향력을 펼치던 1810년 장 피에르 푸조의 아들인 장 피에르 푸조 2세(Jean Pierre Ier Peugeot II), 장 프레데릭 푸조(Jean Frederic Peugeot)가 프랑스 벨포르(Belfort)에 푸조 철강 업체인 ‘푸조 형제 회사(Peugeot-Frere et Compagnie)’를 설립했다. 두 아들은 장 피에르 푸조 소유의 낡은 정곡 공장을 주조 공장으로 개조하고 본격적인 철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냉간 압연과 생활 용품의 대표주자
‘푸조 형제 회사’의 주요 생산 물품은 철제 생활용품이었다. 1814년 푸조 형제에서는 재료를 가열하지 않고 상온에서 두 롤러 사이를 오가며 성형하는 가공법인 냉간 압연 시스템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푸조 형제 회사의 제품들은 기존 제품에 비해 더욱 높은 인장 강도로 우수한 품질을 갖췄다. 이를 바탕으로 톱, 시계 부품과 시계기구 등 각종 생활 용품을 생산하고 뛰어난 품질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일약 생활 용품 제조 브랜드로서 많은 인기를 누린다.
이후 푸조 형제 회사에서는 재봉틀과 공구 박스, 우산 프레임 등 다양한 생활 용품을 제작, 판매하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그라인딩 기술 특허를 적용한 후추 그라인더를 생산하기도 했다. 후추 그라인더 외에도 다양한 주방 용품 또한 생산하고 특히 세계 최초로 커피 그라인더를 제작했다. 후추 그라인더와 마찬가지로 커피 그라인더 역시 그라인딩 기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푸조, 사자를 품다
포르쉐, 페라리, 알파 로메오와 캐딜락 등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창업 가문의 상징이나 창업지의 상징을 엠블럼으로 삼는 것과 같이 푸조 역시 벨포르를 대표하는 사자를 엠블럼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첫 엠블럼은 1850년, 푸조 형제 회사의 로고로서 당시 보석상과 조각상으로 유명했던 쥬스땅 블라제(Justin Blazer)에 의해 만들어졌다. 최초의 로고는 섬세하게 새겨진 사자의 발아래 화살이 놓여진 모습이었고, 당시 생산하던 톱날의 3가지 품질(절삭 속도, 톱니의 경도, 톱날의 유연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후 푸조는 다양한 형태의 엠블럼을 선보이며 1950년 지금의 ‘싸우는 모습의 사자’ 엠블럼을 처음 도입한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다시 사자의 두상을 엠블럼을 쓰는 변화를 도입했다. 그리고 각 브랜드들이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던 1980년이 되자, 푸조는 다시 싸우는 모습의 사자로 형태를 되돌렸고 질감 표면의 변화와 색상, 디테일 등을 변화하며 현재의 엠블럼으로 변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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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 푸조, 자전거에 눈을 뜨다
푸조 브랜드 역사에서 창업자 장 피에르 푸조 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 바로 푸조의 새로운 시대를 연 당사자, 아르망 푸조(Armand Peugeot)일 것이다. 아르망 푸조는 다양한 사업 경력을 자랑하는 조부 장 피에르 푸조와 생활 용품 브랜드로 입지를 굳힌 아버지 에밀 푸조(Emile Peugeot) 사이에서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환경 속에서 뛰어난 기술자이자 경영자로서 키워졌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혼란했던 탓에 프랑스가 아닌 영국에서 공과대학을 다니며 기게 공학에 대한 식견을 키웠다. 그는 유학 도중 자전거에 많은 영감을 얻었고 전쟁이 끝난 1871년 공부를 끝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와 푸조 형제 회사에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다. 이후 아르망 푸조는 1882년 푸조 형제 회사의 첫 패니 파딩 타입(Penny Farthing)의 대형 자전거인 ‘그랑 비(Le Grand Bi)’를 출시한다.
이후 푸조 형제 회사는 꾸준히 자전거 사업을 확장한다. 실제로 1차 세계 대전을 위해 6만 대가 넘는 자전거를 생산하고 공급했다. 이후 1926년 푸조는 자전거 사업을 별도로 분리해 관리하기 시작한다. 푸조 사이클은 꾸준한 성장세를 바탕으로 1930년부터는 보리우(Beaulieu) 공장에서 연간 16만 대 이상의 생산량을 확보하며 주요 자전거 메이커로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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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조, 자동차의 역사를 시작하다
아르망 푸조는 푸조의 자전거 산업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이내 더욱 선진화된 자동차로 옮겨졌다. 아르망 푸조는 차량 주요 기술을 개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증기기관 차량 전문가인 레옹 세르폴레와 협력을 시작한다. 1889년 레옹 세르폴레와의 협력을 통해 개발된 푸조의 첫 번째 삼륜 자동차 ‘세르폴레 푸조’가 완성됐고 세계 파리 박람회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됐다.
하지만 예열 시간과 큰 부피를 가진 증기 기관에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느낀 아르망 푸조는 독일에서 엔진 개발에 집중하며 모터 구동식 마차(Motorised Carriage)를 개발한 고틀립 다임러(Gottlieb Daimler)와 프랑스의 유명 엔지니어이자 르네 파나르와 함께 파나르 르바소를 운영하던 에밀 르바소(Emile Levassor)를 만난 내연 기관 자동차 개발을 위한 협력을 약속한다.
1890년 다임러와 파라르 르바소와 함께 개발한 TYPE 2가 공개됐다. TYPE 2는 증기기관 대신 휘발류 엔진을 장착하고 3륜 대신 4개 휠을 장착한 TYPE 2를 개발했다. TYPE2는 2.5m 길이에 250kg 남짓한 무게로 앞뒤 좌석이 마주보는 4인승 차량이었다. 최대 출력은 2.3마력의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6km을 기록했다. 푸조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푸조, 내연 기관 자동차로 주목 받다
1890년 TYPE 2의 공개를 시작으로 푸조는 본격적인 내연 기관 자동차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이듬해 1891년 다임러 엔진을 장착한 사륜차 TYPE 3를 개발한다. 아직 자동차에 대해 시장의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만큼 푸조는 이를 알리기 위해 고민하고 결국 같은 해 개최된 파리-브레스트 사이클 대회(Paris ? Breast)에 TYPE 3를 출전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대회 측에서 사이클이 아닌 자동차의 출전 이전에 아직 안전성 검증이나 내구성이 검증되지 않은 내연 자동차의 출전이 다른 사이클과 선수들에게 방해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던 만큼 푸조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푸조는 그룹 최후미에서 주행하는 것으로 타협안을 제시하며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TYPE 3는 성공적으로 주행을 마쳤고 관람객들의 많은 환호를 받았다.
세계 최초의 레이스로 기록되고 프랑스자동차클럽(ACF)의 출범의 밑거름이 된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주관 1894 파리-루앙 트라이얼 레이스 역시 푸조에게 기회가 됐다. 아르만 푸조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3.7마력을 웃도는 TYPE 7가 대회에 출전했다. TYPE 7과 드라이버 알베르트 르메트르는 가장 먼저 체커를 받으며 푸조, 다임러 그리고 파나르 르바소에게 영광을 안겼다.
푸조 자동차, 소쇼에 터를 잡다
아르만 푸조는 다임러와 협력 관계 속에서 꾸준히 기술 개발은 이어왔고, 다임러에 지불하는 로열티도 만만치 않았던 만큼 1896년 다임러와의 관계를 처분하고 자체 개발 엔진을 개발을 시작한다. 그리고 아르만 푸조는 자동차 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자동차 브랜드를 공식 출범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다임러와 결별한 이듬해인 1897년 프랑스, 스위스, 독일 국경 지역인 소쇼(Sochaux)에 거점을 두고 푸조 자동차(Societe Anonyme des Automobiles Peugeot)를 설립하며 푸조 자동차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