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30명 추첨' 롤렉스 오픈런에 수백명씩 몰려..몸싸움·고성 아수라장

백주아 기자I 2022.03.23 14:00:00

<명품공화국의 민낯>①
밀치고 넘어지고 대기자간 고성·욕설 난무
일부 텐트족 '음주·도박'에 쓰레기 무단투기까지
구매대행 줄서기 알바 성행..실구매자 피해만↑
판매점·백화점은 손 놓고 바라만.."뾰족한 대안 없어"
롤렉스 구매자는 '잠재적 되팔이' 인식 확산

[이데일리 백주아 기자] “지금 나 쳤어?” “너 얼마 있는데 돈 많냐?” “XX놈아 X치고 뒤에서 기다려!”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롤렉스 오픈런 대기 행렬. (사진=백주아 기자)
지난 16일 오후 8시 서울 강남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롤렉스(현대시계) 오픈런 대기 현장에서는 예약 번호를 받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무역센터점은 전일 예약제로 매일 30명씩 예약을 받는데 백화점 뒤편 좁은 공간에 103명의 인파가 몰리자 한껏 예민해진 사람 간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 예약 방식이 이날 갑자기 선착순에서 무작위 추첨제로 바뀌며 현장 혼란은 가중됐다.

롤렉스 직원이 번호표 배부하고 추첨이 시작되자 떨어진 73명은 허탈하게 발을 돌렸다. 운 좋게 순위권에 들어도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백화점 개점 시간(10시30분)까지 14시간 노숙이 남은 것. 현장에서는 당첨 번호가 20만원에 거래됐고 일당 30만원짜리 줄서기 알바가 출근 도장을 찍었다. 추첨제 이튿날 150명, 사흘째 374명의 인파가 몰리며 고객 불만이 극에 달하자 무역센터점은 오는 24일부터 ‘전화예약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롤렉스 오픈런 번호 추첨. (사진=백주아 기자
스위스 명품 시계 롤렉스 구매 경쟁이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하는 양상이다. 리셀(Resell·재판매)족들로 오픈런(Open Run·매장 문을 열자마자 달려가 구매하는 것) 경쟁이 심화하면서 줄 서기·구매대행 아르바이트가 성행하는가 하면 대기자 간 언어·물리적 폭력 상황도 빚어진다. 판매점과 백화점 측도 상황을 인지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있다. 구매 희망자들 간 ‘총성 없는 전쟁’에 브랜드 이미지도 추락하는 모양새다.

국내 롤렉스 공식 판매점은 서울 6곳, 대전 1곳, 대구 1곳, 부산 2곳 등 총 10곳이다. 백화점별로는 신세계백화점이 4곳으로 가장 많고 롯데백화점 3곳, 현대백화점 2곳, 갤러리아백화점 1곳에 입점해있다. 다만 롤렉스는 본사 직영이 아닌 대리점으로 운영되는 만큼 인원 제한 등 판매 정책이 제각각이다. 이에 지점별로 나타나는 오픈런 부작용 양상도 다르다.

텐트족으로 몸살을 앓던 신세계백화점 타임스퀘어점(카이로스)는 지난 19일부터 텐트 사용을 금지했다. 일부 몰지각한 텐트족이 밤샘 노숙에 머문 자리에서 배달 음식물 쓰레기를 투기하는가 하면 음주 가무에 도박판을 벌이는 추태까지 보이면서다. 롯데백화점 월드타워점(나우워치)는 텐트를 금지했지만 명동본점(크로노다임)은 여전히 허용하고 있다.

오픈런 경쟁을 부추기는 건 리셀러 탓이 크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유통가 대비 리셀가가 최소 200만원에서 800만원까지 치솟으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장에 뛰어든다. 이런 상황에 줄 서기·구매대행 업자까지 가세하며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줄 서기 대행 알바가 ‘세상 가장 쉬운 직업’이라고 입소문을 타면서 취업 준비생이나 실직자들은 구인 대신 알바를 전전한다.

수개월간 줄서기 알바를 해온 박 씨(가명·28세)는 “한 달 기준으로 못 벌면 200만원 많이 벌면 400만원까지 번다”며 “다른 일자리 구하기가 마땅치 않고 고정 수입이 아니라 불안하지만 생업을 위해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근처 오픈런 참여자가 남기고 간 쓰레기. (사진=제보)
다만 과열된 시장에서 피해 보는 건 실구매자다. 40여 일간 오픈런 현장에 나온 김 씨(가명)는 “금통 모델 하나 구입하려는 것뿐인데 리셀러 등 전문 판매업자 때문에 실구매자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며 “현재까지 줄 서기 알바에만 800만원을 썼다”고 토로했다.

롤렉스 판매점 측도 이 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만 대안이 없다고 설명했다. 가려낸다고 가려내도 리세일러를 막을 수 없는 데다가 새로운 대안을 낼 때마다 부작용이 진화한다는 설명이다. 실제 백화점 옆 인도에 대기줄을 세웠던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우노와치)는 빗발치는 민원에 오픈런 대신 40명 전화예약제 운영으로 방법을 전환했다. 그러자 줄 서기 시장을 넘어 전화 예약 성공 시 15만원, 물건구매 성공 시 40만원을 주는 알바가 생겼다. 오픈런 참여자 사이에서는 구매대행 업체 중 보이스피싱 조직도 있다는 얘기까지 돈다. 롤렉스 구매대행으로 돈 세탁을 하는가하면 구매 대행을 미끼로 알바생에 현금 인출을 종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백화점 측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입구를 막은 노숙 행렬에 기존 VIP 고객들 불만이 사그라들지 않지만 입점사 각각의 판매 정책에 관여하는 것은 공정거래법에 어긋나는 만큼 안전 문제 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치밖에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건전한 오픈런 문화를 선도하는 올어바웃롤렉스 카페 노모 대표는 “일부 업체들이 불문율처럼 지키고 있던 자리 알박기, 선점, 매점매석, 자리 비우기 등의 부당한 규칙 등을 바꿔왔다”며 “매장 오픈런 정책 변화 때마다 꼼수를 부리는 부류들이 나타나지만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회원과 논의하면서 올바른 오픈런 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본점 오픈런 텐트족. (사진=제보)
롤렉스 구매 경쟁으로 부작용이 속출하면서 브랜드 격은 떨어지고 있다. 찐부자들이 최근 너도나도 다 사는 샤넬 구매를 기피하는 것처럼 롤렉스 충성 고객은 지금 사면 ‘리셀러’라는 낙인이 찍힐까 구매를 미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 롤렉스 판매점 직원은 “고객분들의 안전과 리셀러 방지를 위해 여러 대안을 고민하고 있지만 고객 불만을 잠재울 재간이 없다”며 “오랫동안 우리 지점을 이용한 고객분들에게는 지금 시계를 사지 말고 기다렸다가 구매하라고 말씀 드린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롤렉스 열풍과 함께 파생하는 현상들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명품에 환장해 펑펑 돈을 쓰는 계층이 있는가 하면 생산성 없는 줄 서기 알바를 찾는 사람들까지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롤렉스 구매자에게 웃돈을 붙여 판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도 답답한 일이지만 청년들이 생산성 없는 단기성 일자리를 전전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라며 “아무리 내 집 마련이 어려운 시대라 해도 마약과 같은 단기성 일자리나 실업 급여에 의존할 경우 개인의 성장 잠재력과 국가의 경제 활력은 바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지난 18일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롤렉스 오픈런 추첨제에 몰린 인파. 이날 현장에는 30명 안에 들기 위해 374명이 몰렸다. (사진=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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