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지현 기자] 강남역 살인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정부가 동기 없는 범죄에 대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남·여 화장실 분리 설치 의무 대상 건물의 범위를 확대하고 여성 대상 강력범죄에 대해서는 강화된 형사처벌 기준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반복되는 CCTV 확대가 이번에도 포함된 데다 남·여 공용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조현병(調絃病)으로 인한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범죄였다는 특성만을 반영한 대증용법식 대책이어서 여성비하·양극화 등 근본적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처방이 아쉽다는 지적이다.
◇여성 상대 범죄 ‘무관용 원칙’ 적용
1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법질서관계장관회의에서 국무조정실, 법무부, 행정자치부, 국민안전처, 경찰청, 여성가족부는 합동으로 ‘여성대상 강력범죄 및 동기 없는 범죄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우선 정부는 여성대상 강력범죄에 대해 지난 3월에 마련된 강화된 형사처벌 기준을 적극 활용키로 했다. 이에 따라 ‘여성은 양형기준상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라는 원칙을 준용해 검사는 관련 범죄자에게 형량 범위내 최고형을 구형하고 구형보다 낮은 형 선고 시 ‘무관용 원칙’에 따라 적극 항소하기로 했다.
정부는 강남역 살인사건과 같은 사건 재발을 위해 신축건물에 대한 남·여 화장실 분리설치 의무대상 범위를 확대한다. 현재 남·여 화장실 분리설치 의무대상은 3000㎡ 업무시설과 2000㎡ 이상 업무시설·근린생활시설 복합건물이다. 정부는 ‘공중화장실법시행령’ 개정해 의무대상 범위를 확대할 방침이다. 또 기존 공용화장실을 남·여 화장실로 분리설치할 경우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이달 중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오는 7월부터 입법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또 예산 604억원을 투입해 어두운 골목길 등과 같은 범죄 취약지역에 CCTV 5493개소를 내년에 추가 설치키로 했다. 경찰은 강도·강간 등 강력범죄와 여성 영세상인 갈취, 여성 근무 주점·노래방 등 갈취 사범, 데이트 폭력사범 등을 집중적으로 단속해 여성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인을 사전에 차단하기로 했다.
◇ 흉기 든 정신질환자 강제입원 신청
정신질환과 알코올 중독에 대한 치료지원이 강화된다. 정신질환 의심자가 흉기를 갖고 있거나 일반인을 폭행할 경우 경찰관이 정신보건기관 등을 통해 지방자치단체장에게 강제입원을 신청토록 하는 ‘행정입원’ 조치를 추진키로 했다. 행정입원의 인권침해 우려 해소를 위해 정신질환자 판단용 체크리스트, 입원요청 기준 등 매뉴얼을 정비하고 위법한 강제입원 구제를 위한 인신보호관 제도 도입도 20대 국회에 추진하기로 했다.
오는 12월 2일부터는 강력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주취·정신장애 경미 범죄자의 재범방지를 위해 치료명령제도가 시행된다. 정부는 하위법령을 정비해 치료감호기간 연장제도 등이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게 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형기 종료된 연쇄살인범 등 흉악범죄자를 별도 수용해 관리·감독하며 사회복귀를 지원하는 보호수용제도 도입도 추진한다. 여성대상 강력범죄자 가석방 심사 강화 및 석방예정자 적극 통보 등 강력범죄자에 대한 사후관리도 강화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졸속대책이라고 지적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잇따른 사건으로 (정부가) 다급하게 규정을 만든 것 같다”며 “양극화로 인한 갈등, 분노, 억울함 등에서 비롯된 사회문제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이런 대책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까 싶다”고 말했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장은 “사회적 문제가 되는 사건이 날 때마다 정부는 특정 용어만 바꿔서 비슷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부가 묻지마 범죄, 강력범죄 등과 구분하려다 보니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며 “남녀 차별 조장에 대한 국가적 개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정부가 대책을 내놔도 이같은 사건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