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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왜 안방을 열기 시작했나

오마이뉴스 기자I 2003.10.13 18:16:23
[인터넷신문 공동취재단] (인터넷신문협회 공동취재단은 지난 10월6일부터 3박4일간 육로평양관광단과 동행해 평양-개성을 취재했다. 다음은 공동취재단의 일원인 오마이뉴스 오연호 기자의 방북기이다....편집자 주) 북한이 남한 시민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의 속살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10월6일 57년만에 열린 "평양으로 가는 땅길"을 타고 북한의 수도에 들어간 남쪽인사들 1천여명은 평양시내 곳곳을 돌면서 평양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평양이 남한 시민들에게 안방까지 열어보이기 시작한 셈이었다. 기자는 이번이 두 번째 방북이었다. 첫 번째는 지난 98년 겨울 금강산이 처음으로 남쪽 시민들에게 공개될 때 기자단에 속해 방북했다. 그때는 "북한 주민들과의 만남"은 거의 없었다. 사람이 아닌 산과의 만남이었다. 간혹 안내원들과의 대화가 오고갔지만 몇 마디에 그쳤다. 그로부터 5년 후 다시 기자단의 일원으로 첫 번째 육로평양관광을 취재하기 위해 방북을 한 것이다. 두 번째 방북은 버스를 타고 평양에 간 것인 만큼 첫 번째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번엔 산이 아니라 사람을 보았다. 황석영씨 말대로 그쪽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새로 뚫고 있는 경의선 도로를 달려, 개성시내를 관통하고, 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이르는 동안 "천 가지의 북한 사람 사는 모습"을 차창 밖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평양의 거리에서 그들의 모습을 더욱 가까이에서, 대화도 하고 악수도 하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선 "특별한 방문객을 위한 특별한 치장"이 거의 없었다. 낫으로 벼를 베고 있는 사람들, 밭에 거름을 주고 있는 사람들,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사람들, 대동강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들, 평양시내 도로를 걷는 출퇴근하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남쪽 기자들과 일반 관광객들은 평양 거리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허용되었다. 1년 전에 평양을 방문했던 한 기자는 "그때와 비교해보면 안내원들의 통제가 상당히 유연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육로평양관광단보다 불과 1주일 전에 방북했던 또다른 <오마이뉴스> 기자도 평양시내에서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고 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이번 육로관광단을 맞이하면서 평양의 안방까지 열어보이기 시작했을까? ◇"우린 남쪽보다 못산다...그러나 흔들리지 않는다" 북한이 평양의 안방을 열기 시작한 것은 "누가 좀더 잘 먹고 사느냐"의 문제는 이미 숨길 일이 아니다는 판단에서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 안내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뒤떨어진 경제현실을 인정했다. 한 안내원은 "우리는 남쪽에 비해 못 먹고 못 입는 게 사실입니다. 많이 부족한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어려움은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나온 것"이고 "김정일 장군님의 선군정치로 그 어려움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지만 남쪽인사들에게 북한의 실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채로웠다. 꼭 직업기자가 아니더라도 남한 시민이라면 육로로 평양을 관광하면서 "북한의 수준"을 나름대로 체크할 것이다. 보는 사람이 민망하리만큼 나무가 없는 개성 주변의 민둥산들, 서울이라면 재건축대상으로 취급받을 만한 평양시내의 투박하고 낡은 살림집들, 불을 밝힌 가로등보다 불을 밝히지 않은 가로등이 더 많은 평양 시내 도로....모든 것이 한국의 70년대 중반 수준을 닮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이 남쪽 관광단에게 평양을 그대로 보여준 것은 현재의 경제격차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도 상황만 호전되면 충분히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 같다. 북측 안내원들은 대화도중 곳곳에서 "풍족했던 70년대"를 언급했다. "70년대에는 우리가 남조선보다 훨씬 잘 살고 풍족했잖습니까? 그때는 아이들이 상점에 50전을 가지고 가면 과자며 사탕이며 두 바지 주머니에 몽땅 넣고 다녔지요. 그러다가 그것을 다 못 먹고 사탕이 줄줄 흘러나오기도 했지요." 배불러서 다 못 먹고 남기던 시절이 북한에도 있었다는 역사적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오늘의 고난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인민대학습당 6층 전망대에서 한눈에 펼쳐진 평양을 내려다본 남측 관광단의 눈길을 붙잡아놓은 구호는 "우리는 행복해요"였다. 정말 그들은 행복한 걸까. 방북단으로 참여한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그들이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구호로 행복해요, 행복해요 하니까 정말 행복한지 불안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행복은 남한 방문객들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안내원들은 "지금은 힘들더라도 상관없습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들의 생각은 평양에 내걸린 다음과 같은 구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 평양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중심의 "일심단결"을 강조하는 구호가 넘쳐났다. 심지어 이번에 개관된 류경 정주영체육관 중앙에 매달린 스코어 전광판에도 "위대한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는 이긴다" 등의 각종 구호가 흐르고 있었다. 밤이 되면 평양시내의 주요 도로는 어둠에 휩싸인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가로등을 대부분 꺼 놓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둠에 잠긴 도로에도 환한 빛을 비추고 있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한 구호를 비치는 조명등이었다. "장군님만 믿고 삽니다" 가로등은 끄더라도 장군님 구호는 밝혀주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평양이었다. 지금은 비록 어렵더라도, 남측방문단이 어떤 영향을 줄지라도 평양시민들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내부판단을 북한 지도부는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활기 되찾은 평양....이 정도면 남쪽 사람들에게 보여줘도 괜찮다? 평양 붉은거리에 있는 대성수출품전시장을 가는 길은 "여전히 어려운 평양"과 "활기를 되찾아가는 평양"의 양면을 모두 보여주었다. 평양에의 자랑거리라는 대성수출품전시장은 남쪽의 한 동네에 있는 슈퍼마켓 수준이었다. 한 층에 40여평 크기로 3층에 걸쳐 전시된 과자, 옷가지, 장남감 등은 대부분 조악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수출품전시장으로 향하는 도로인 붉은거리는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로 붐볐다. 차량은 1분에 30여대가 지나갈 정도였다. 오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건강하고 활달해보였다. 평양이 안방문을 열기 시작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전에 비해 평양에 활기가 넘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10월 7, 8일 아침 9시경, 고려호텔 인근에 있는 평양역은 출근 인파로 몰렸다. 사람 수로만 따진다면 서울역앞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평양시내 곳곳에서는 살림집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안내원은 "대부분의 건물이 70년대에 지은 것이어서 안과 밖이 모두 낡았다"면서 "작년부터 대대적으로 개조공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 "그럼 건물 외관까지 신경쓸 정도로 형편이 좀 나아졌다는 말입니까"라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언제까지 바짝 긴장하고만 살 것인가, 할 것은 하면서 살아야지." 을밀대가 있는 모란봉 공원에서는 평양승리 유치원생들이 어머니들과 함께 소풍을 나와 있었다. 그들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활춤을 추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자기 아이들을 뿌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면서 "운용아, 잘하라 이제", "세게하라 이제"라면서 응원했다. 6살인 오성 어린이는 "2년간 배웠다"면서 "가끔 이렇게 소풍 나옵니다"라고 말했다. 한 유치원생의 어머니는 "우리는 유치원부터 모두 국가에서 교육을 시켜줍니다"라는 자랑을 잊지 않았다. 인민대학습당은 평양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측 관광단들은 "전망대가 따로 없군", "정말 평양은 터 하나는 끝내주는 곳이군" 이라면서 도도히 흐르는 대동강을 따라 한 눈에 잡힌 평양을 감상했다. 그곳에서도 평양의 활기는 느낄 수 있었다. 인민대학습당 좌측으로 펼쳐진 거대한 분수대공원에서는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주민들과 학생들의 모습이 다수 보였다. 남쪽 주민들을 맞이하는 평양시민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고려호텔 주변에 있는 지하철역인 부흥역에서 다음 정거장인 영광역까지 이동하는 동안 남측 방문단은 평양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곳곳에서 남쪽 방문단과 평양 시민이 악수를 하면서 인사말을 건넸다. 50대 남쪽 아저씨가 지하철을 타러 가는 소학생의 머리를 만지면서 "그놈 참 귀엽다, 몇 살이지?"하면 "열살입니다, 반갑습니다"하면서 활짝 웃었다. 영광역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역 밖으로 나가는 남쪽 주민들과 지하철을 타려는 평양시민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연신 "반갑습니다" 하면서 손을 흔들어댔다. 그들은 누가 먼저 선창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우리는" "하나다"는 구호를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일부 평양시민들은 남쪽 사람들에게 먼저 달려와 환한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방문단으로 참여한 대학생 양선이(고려대 3년)씨는 "그동안 반공교육을 통해 평양을 잿빛도시로만 생각했는데 그에 비하면 너무 활기차다"고 말했다. 이기형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은 "6.25전쟁의 폐허 위에서 이러한 계획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고 했다. 심재권 의원은 "평양이 생각보다 안정된 모습을 보여줘서 다행"이라면서 "지도부가 개혁개방의 길을 잘 해나가야할텐데"라고 말했다. ◇"현대 아산이 살아야 조국이 산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지난 6일 아침 육로방북단이 평양을 향해 출발하기에 앞서 기자를 만나 "이번에 북측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가서 보니 정말 그랬다. 현대아산과 북한은 이미 "통일"이 되어 있었다. 6일 있었던 류경 정주영체육관 개관식 축사에서 김운규 사장은 "존경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는 표현을 3번 썼다. 김 사장은 개관식 문화공연이 SBS로 생중계될 때에도 소감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특히 정주영 명예회장과 존경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배려없이는 체육관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표현을 썼다. 북측도 각종 행사의 인사말과 노동신문을 통해 정주영-정몽헌 회장에 대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애국"한 분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노동신문 7일자는 정주영 체육관 개관 소식을 사진 3장과 함께 1면과 4면에 대서특필했다. 육로평양관광단에 동행한 한 대기업연구소 연구원은 "북한은 정몽헌 회장의 자살 이후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현대 아산이 살아야 조국이 산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대아산이 망하게 되면 "대북사업에 손을 대면 망한다"는 등식이 성립돼 남한기업의 대북투자가 끊길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북측의 한 안내원은 이렇게 말했다. "정몽헌 선생이 자살한 것, 그게 참 뜻밖이더란 말입니다. 정주영씨가 좋은 애국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믿음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왜서 그렇게 자살이라는 끔찍한 길을 선택했는지. 이 모든 것이 남북협력을 못하게 미국과 한나라당 패거리들이 압력을 넣으니까 생긴 일 아닙니까." 따라서 이번에 북측이 남측방문단에게 가급적 자유롭게 평양을 구경할 수 있게 한 것은 현대아산의 관광사업을 성공시키는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김윤규 사장의 눈물 "이 사업은 현대만의 사업이 아닙니다" 동행한 기자들은 대체로 이번 방북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남북은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성숙함을 보였다. 남쪽방문단은 김일성 주석 생가 앞에서 "김일성 주석의 탄생은 우리 인민의 크나큰 행운"이라는 등의 북측 안내원의 김일성 찬양이 이어지는데도 설명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고개도 끄덕여주었다. 북측의 배려도 감지됐다. 만경대소년학생궁전에서 이뤄진 공연에서도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내용도 포함됐지만 남측노래인 "아침이슬", "감격시대" 등도 포함됐다. 3박4일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남측방문단으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렇게 자주 만나야 한다"였다. 중소기업인 노상철씨(신일프레임 대표)는 두 달만에 다시 평양과 개성을 찾은 경우다. 액자를 만들어 수출하는 그는 개성공단에 공장부지로 5천평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그는 이번 방북에서 사업적 설계도 더욱 구체화시키고 북쪽 친구도 다시 만나는 일석이조의 성과가 있었다. 그의 북쪽 친구는 개성 역사박물관에서 근무하는 여자안내원. 두 사람은 "이렇게 자꾸 만나면 정들어 어떻하지"라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SBS주주이기도 한 기업인 장세헌씨(제일산업 회장)는 "서울과 평양이 멀어질 수 없는 거리인데 왜 그렇게 멀어졌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국제전화를 사용해봤는데, 미국은 되는데 서울은 안됐다"면서 "육로관광까지 왔지만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남북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들이 더 많이 와서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방북에 동참했던 현대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육로관광은 통일을 10여년 정도 앞당긴 획기적인 사건인데 국내 정치환경 때문에 이 이벤트가 옹색하게 평가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북사업에 대한 남한 내의 옹색한 평가 때문인지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6일 류경체육관 개관식 축사의 마지막 대목에서 끝내 울먹였다. 김 사장은 그 축사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이 사업은 현대만의 사업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이번에 방북한 여러분들은 그런 점에서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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