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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경남 창원시 소답동. 사람들은 그 집을 ‘꽃집’이라 불렀다. 마당 가득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집이라서다. 동시 ‘고향의 봄’을 쓴 시인 이원수(1912∼1981)도 그 풍경을 기억했다. 어린 시절 바라보던 그 집의 정원이 훗날 국민동요가 됐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노래. 그 노래 속 ‘울긋불긋 꽃대궐’은 실제로 존재했던 곳이다.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이 나고 자란 바로 그 집이다.
김종영은 1915년 창원 사대부 가문의 ‘꽃대궐’에서 오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창원 일대에 넓은 들을 거느린 김해 김씨. 이름난 명문가였다. 증조부는 대한제국 말기 관직을 지냈으나 나라가 기울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부 또한 관직을 접고 낙향했으며 부친 김기호는 끝내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명예보다 신념을 중히 여긴 고고한 선비의 기개가 대대로 흐르고 있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 김종영은 다섯 살 무렵부터 아버지에게 한학과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글씨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932년 휘문고보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때에는 동아일보 주최 ‘제3회 전조선학생작품전람회’에서 서예부문 중등부 장원을 차지했다. 또래의 수준을 훌쩍 넘은 그의 글씨에 심사위원들조차 “정말 중학생의 작품이 맞는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결국 현장에서 직접 붓을 잡고 써보였고 그제야 심사위원들은 수긍했다. 그러나 이후 김종영은 자신의 서예작품을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다. 서예는 드러내기 위한 예술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수행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말 중학생이 쓴 서예작품이 맞는가”
서예와 한학으로 예술의 기초, 마음의 근본을 닦던 김종영에게 휘문고보 시절 만난 스승 장발(1901∼2001)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미술과 미학을 수학했던 장발은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일본 유학을 권했고, 1936년 김종영은 동경미술학교(지금의 도쿄예술대) 조각과 소조부에 입학하며 조각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당시 동경미술학교의 교육은 보수적이었다. 근대 이전의 서양조각 전통을 따르며 사실적인 인체 재현에 집중했다. 학생들은 근육의 비례와 해부학적 정확성을 익히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들였고 기술적 완성도를 중시했다. 그러나 김종영은 이런 방식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인체의 아름다움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기는 일보다 그 속에 숨어 있는 ‘형태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집을 구해 탐독하며 연구했다. 비록 실물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사진과 자료를 통해 작품의 구조와 질감, 형태가 전달하는 감각까지 세심하게 살폈다. 이 과정을 거치며 그는 ‘조각이 단순한 인체의 모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얻었다. 서예가 글자에 정신을 담듯, 조각 또한 형태에 정신을 새겨 넣어야 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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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김종영은 예술가라기보다 성실한 마을 이장에 가까웠다. 동네 주민들에게 새로운 작물 재배를 권했고 직접 흙을 만지고 밭을 일구며 근면과 자연의 이치를 익혔다. 훗날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한 것은 예술가와 농부의 미덕”이라고 말했던 그는 이미 그때 예술의 본질을 생활 속에서 체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재능은 오래 묻혀 있을 수 없었다. 스승 장발이 서울대 예술대 미술부장으로 부임하면서 김종영을 조소과 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1948년 일이다. 이후 그는 198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32년간 대학에서 후학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인 김세중(1928∼1986), 송영수(1930∼1970), 최만린(1935∼2020), 최종태(93) 등은 훗날 한국 현대조각의 중심을 이루며 김종영이 열어 놓은 시대를 이어갔다.
그렇게 미술계로 돌아온 김종영은 자신만의 조형세계를 꾸준히 다져 나갔다. 그 결실이 처음 드러난 것은 1953년 5월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영국 런던 테이트갤러리에서 열린 ‘국제조각공모전’에서 입상하며 세계무대의 주목을 받았다. 상념에 잠긴 여인을 표현한 출품작은 세부 묘사를 과감히 줄이고 형태를 단순화해 눈길을 끌었다. 당시 한국 조각계에서는 보기 드문 추상적 접근이었다. 여전히 구체적인 형상을 사실적으로 만들던 한국에서는 생소했지만 국제무대에서의 성과는 김종영에게 추상에 대한 확신을 심어줬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한국미술이 세계 속 한국미술이 되게 하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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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은 한국미술이 세계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보편성 위에 세워진 ‘특수성’을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이면서도 그 안에 한국적인 정서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동서양의 미학을 비교·연구하며 서로의 장점을 조화롭게 융합했다. 어린 시절 익힌 동양철학과 서예정신은 이미 그의 내면에 녹아 있었고 여기에 서구 추상조각의 이론과 형식이 더해졌다. 서구 작가들의 작품을 세밀히 분석하며 마치 서예의 ‘임서’(臨書, 자습서를 두고 보며 쓰는 것)처럼 그들의 조형을 직접 따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 연구의 결실로 탄생한 것이 김종영 예술론의 핵심인 ‘불각(不刻, 깎지 않는다)의 미’다. 이는 사물을 인위적으로 깎지 않고 재료와 형태가 스스로 질서를 드러내도록 하는 아름다움을 뜻한다. 작가의 손길은 최소화하고 본연의 물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깎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포기나 태만이 아니다. 오히려 여백과 침묵 속에서 조형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태도였다. 이러한 접근 때문에 미술평론가들은 김종영을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예술가가 아니라 형태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연구자’로 평가했다.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작업에 임한 김종영은 한 번도 남의 손을 빌려 작품을 제작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조각은 언제나 혼자 다룰 수 있는 크기였다. 작업 중에도 작품 앞에 앉아 물끄러미 형태를 바라봤고 틈틈이 손으로 표면을 어루만지며 조금씩 다듬어 나갔다. 그의 손길이 구석구석 묻어 있는 조각작품에서는 따뜻한 체온과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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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매일 작품과 함께하며 살아간 그는 1982년 예순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20여 점의 조각작품, 2000여 점의 서예작품, 3000여 점의 드로잉을 남긴 채였다. 아호 ‘우성’(又誠)이 뜻하듯 평생 ‘성실하고 또 성실하게’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결실이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는 김종영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유족 7남매가 세운 곳으로 조각가 김종영의 성실함과 ‘불각의 미’ 정신을 후대에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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