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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법조계에 따르면 과거사위는 전날 9차 회의를 열고 고(故) 장자연 사건(2009년)과 KBS 정연주 사건(2008년), 용산참사 사건(2009년) 등 수건을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에 권고할 2차 사전조사 대상으로 잠정 합의했다. 애초 과거사위는 이날 2차 사전조사 대상을 선정·발표하려고 했지만 먼저 권고한 1차 사전조사 대상에 대한 진상조사단의 사전조사가 늦어지면서 다음달 초쯤 발표할 예정이다.
앞서 과거사위는 지난달 6일 1차 사전조사 권고 대상으로 김근태 고문사건(1985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1991년), PD수첩 사건(2008년), 청와대 및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사건(2010년) 김학의 차관 사건(2013년) 등 12건을 발표했다.
◇故장자연 사건·KBS 정연주 사건·용산참사 등 재조사
과거사위가 2차 사전조사 대상으로 발표한 사례는 검찰의 부실 혹은 편파수사 논란이 불거졌던 사건들이다.
장자연씨 사건의 경우 신인배우인 그가 2009년 3월 30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당시 유력 언론사 사주와 방송사 PD, 경제계 인사 등에게 술과 성을 접대했다는 기록을 남겨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2009년 8월 19일 수원지검 성남지청 형사3부(부장 김형준)는 폭행 및 협박 혐의로 김모 전 소속사 대표를, 명예훼손 혐의로 유모 전 매니저를 각각 불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술 접대와 성상납 명단인 이른바 ‘장자연 문건’에 오른 10여 명의 유력 인사들은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서 모두 무혐의 처분됐다.
정연주 전 사장 사건은 검찰의 표적수사 논란이 벌어졌던 사건이다. 2008년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부장 박은석)는 정 전 사장이 국세청을 상대로 한 법인세부과취소소송에서 법원 조정권고를 받아들여 소송을 취하해 1892억원을 더 받지 않아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는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로 불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정 전 사장은 1심과 2심에 이어 지난 2012월 1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정 전 사장은 2008년 부실경영과 인사전횡 등을 이유로 해임요구를 한 감사원 결정 이후 이사회를 거쳐 해임됐다. 당시 검찰 수사를 두고 이명박 정부의 노무현 정권 인사 솎아내기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용산참사 사건은 이 지역 재개발을 두고 철거민이 된 세입자들이 건물 옥상에서 농성하던 중 경찰과의 격한 대치와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 등 총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다. 지난 2009년 2월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 안상돈)는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상과 특수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농성자 김모(52)씨 등 5명을 구속기소했다. 또 나머지 농성자 15명과 용역업체 직원 7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진압에 나선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특공대에 대해선 참사로 이어진 화재에 직접 책임이 없고 작전이 적법했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국민 청원 20만 돌파…“처벌 어렵지만 진상규명에 의미”
이날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게시판에 따르면 ‘고 장자연의 한 맺힌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세요’ 라는 청원 글에 대한 동의는 오는 28일 마감일을 앞두고 청와대가 의무적으로 답변해야 하는 20만건을 넘었다. 이날 현재 23만 2000여 명이 이 사건에 대한 재수사 실시에 동의했다.
이런 가운데 과거사위가 이 사건을 검찰이 재조사해야 할 사건으로 지목해 진상규명의 길이 열렸다.
다만 공소시효 문제로 처벌은 어렵다는 게 법조계의 다수 의견이다. 이에 따라 진상조사단이 당시 검찰 수사에 소홀한 부분이 없었는지에 초점을 맞춰 재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노영희 법무법인 천일 소속 변호사는 “장씨가 작성한 리스트에 나온 인물들이 공무원이 아닌 데다 이 사건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점 등으로 실제 처벌까지 이어질 지는 미지수”라면서도 “원점에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한규 법무법인 공간 소속 변호사도 “현재 미투 열풍과 더불어 꼭 진상규명해야 할 사건”이라면서 “적어도 당시 검찰 수사에 어떤 과오가 있었는지, 직무유기했던 부분은 무엇인지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가 사망해 강요에 의한 성폭력이 있었는지 밝혀내기는 어렵지만 당시 검찰 수사의 과오가 있었던 부분이라도 기록으로 남기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