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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진정인인 ‘정치하는엄마들’은 “영유아 상품을 생산하는 회사들이 기능과 무관하게 성별을 구분하고, 소꿉놀이를 여아 놀이로 취급하는 등 아이들에게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화시키고 있다”며 이를 개선해달라고 진정을 제기했다.
이에 피진정인은 “판매·유통상 편의를 위해 상품에 성별을 표기했고, 이는 색깔에 따라 성별을 구분하는 사회·문화적 관행에 익숙한 소비자의 선호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인권위 조사 중 피전정인은 영유아 상품에서 성별표기 및 성차별적 문구를 삭제 조치하거나 앞으로 개선할 계획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색깔 따라 性역할 고정관념 우려…미래 행동·가치관·직업선택 영향
인권위는 “상품의 색깔에 따른 성별 구분은 20세기 중반 이후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로 전환되며 생기기 시작했다”며 “198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판매 전략으로 자리 잡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경향은 상당 기간 유지돼 현재에도 영유아 상품의 상당수가 성별에 따라 색깔을 구분하고 있다. 실제 소꿉놀이나 인형 등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분홍색 계열로, 자동차나 공구세트와 같은 기계류 등은 파란색 계열로 제작하고 있다.
인권위는 “아이들은 색깔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에 따라 여성은 연약하고 소극적이고, 남성은 강인하고 진취적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학습하게 된다”며 “가사노동이나 돌봄 노동은 여성의 역할이라는 인식을 무의식중에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 인권위는 성역할 고정관념은 아이들 미래의 행동, 가치관 및 직업선택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으로 우려했다. 인권위는 “아이들은 사회·문화적 관행에 따라 구성된 젠더(gender)에 맞는 성역할을 학습하게 되고, ‘여자다움’, ‘남자다움’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사회화돼 성차별이 심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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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영유아기는 사회규범을 내면화하고 성역할을 습득하는 등 개인의 가치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기로, 성역할 고정관념 등을 비판 없이 수용하기 쉽다. 인권위는 “영유아기에 제공되는 놀이, 경험 등의 환경은 아이들로 하여금 그것이 자신에게 적합하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한다”며 “그 결과로 행동이나 태도 그리고 놀이와 직업을 선택할 때 스스로 원하는 것이나 자신의 재능 또는 가능성이 아닌,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성에 대한 정형화된 관점에 따른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최근 해외 각국에서도 성별을 구분하는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비판과 지속적인 개선요구로 영유아 상품의 성별 구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은 2015년 5월부터 기존에 남아, 여아로 구분하던 아동용 완구를 ‘아동완구’로 통합했다.
인권위는 “미국과 영국의 완구 매장에서 성별 구분을 없애는 곳이 늘고 있다”며 “성별을 구분하는 것이 성역할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기업들도 성별 구분을 삭제하는 등 개선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영유아 상품의 성별 구분은 단순한 ‘구분’에 머무르지 않고 성역할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며 “우리 사회가 성별에 따라 색깔을 구분하는 방식을 탈피,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 자체로 접근하는 ‘성중립적인’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표명을 결정한 이유를 밝혔다.
한편 인권위는 이번 진정사건은 상품의 색깔을 성별구분 기준으로 삼아 상품에 성별을 표기하고 있으나 소비자가 해당 상품을 구매하는 데 제한이 있지는 않은 점을 고려해 진정사건에 대해서는 인권위법에 따라 ‘각하’ 결정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