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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가 된 젊은 천재…그림도 삶도 '빛과 어둠' [화폭역정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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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기자I 2026.10.23 07: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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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한 줄 빛'으로 유럽회화 문법 만든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20대 초 미술의 심장 로마에 입성한 뒤
큰 그림 부속 꽃·과일 그리며 생계 이어
재능 꿰뚫은 추기경 주선, 성당그림 제작
짙은 어둠 속에 한 줄기 빛 흘린 명암법
사실적 인물, 누추한 현실로 옮긴 성화로
3부작 완성 뒤 단숨에 최정상 화가 등극
거친 성정 탓 사건·사고, 끝내 살인까지
도망자로 4년여 떠돌다가 38년 생 마쳐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성 마태의 부름’(1599∼1600). 무명의 카라바조를 단숨에 최정상으로 끌어올린 시작점이 됐다. 연달아 두 점(‘성 마태의 순교’ ‘성 마태와 천사’)을 더 그린 3부작으로 구성해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부속 콘타렐리 예배당(좌측·우측 벽면과 중앙제단)을 장식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한 장면(예수가 돈을 세던 세리 마태를 발견하고 불러낸 순간)을 컴컴한 선술집으로 가져와 밝고 신성하게만 그리던 르네상스 성화의 틀을 깼다. 어둠에 빛을 쏜 명암법은 이후 유럽회화의 핵심 기법이 됐다. 캔버스에 유채, 322×340㎝.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이탈리아 로마) 소장.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성 마태의 부름’(1599∼1600). 무명의 카라바조를 단숨에 최정상으로 끌어올린 시작점이 됐다. 연달아 두 점(‘성 마태의 순교’ ‘성 마태와 천사’)을 더 그린 3부작으로 구성해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부속 콘타렐리 예배당(좌측·우측 벽면과 중앙제단)을 장식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한 장면(예수가 돈을 세던 세리 마태를 발견하고 불러낸 순간)을 컴컴한 선술집으로 가져와 밝고 신성하게만 그리던 르네상스 성화의 틀을 깼다. 어둠에 빛을 쏜 명암법은 이후 유럽회화의 핵심 기법이 됐다. 캔버스에 유채, 322×340㎝.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이탈리아 로마) 소장.
살인자가 된 젊은 천재…그림도 삶도 '빛과 어둠' [화폭역정 31]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과일 바구니 하나가 돌 선반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밖으로 밀려 나온 바구니는 조금만 건드려도 보는 사람 쪽으로 쏟아질 것만 같다. 배경은 텅 비어 있다. 이 과일 바구니와 연결될 법한 신화도, 우화도, 그럴듯한 실내도 없다. 오직 밝은 벽 앞에 과일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단순한 재현에 우리는 사로잡히고야 만다. 사과에는 벌레가 파먹은 구멍이 뚫려 있고, 잘 익은 무화과는 살이 벌어졌으며, 포도 몇 알은 이미 물러 터지기 시작했다. 잎사귀는 싱싱한 초록이 아니라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말라 오그라들고, 어떤 잎은 반점이 번져 병든 기색이 완연하다. 이탈리아의 스물일곱 젊은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는 이 시들어가는 것들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았다.

훗날 이 그림 ‘과일 바구니’(1599)는 식물학자와 원예학자, 나아가 식물병리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됐다. 화면 속 잎과 열매에서 병증을 종별로 밝혀냈을 정도다. 어느 잎의 구멍은 동양과실나방 유충이 갉은 자국이고, 다른 잎의 반점은 탄저병이며, 또 어느 잎에는 곰팡이가 슬었고, 사과와 배에는 저마다 다른 벌레가 다녀갔다는 것이다. 그림 한 점이 이렇게 정밀한 과학적 판독에 참조되는 일은 흔치 않다.

이 정물화의 급진성은 솜씨의 정밀함에만 있지 않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정물화는 화가가 마지못해 그리는 하급의 장르였다. 역사화와 종교화가 그림의 정점에 있었고, 꽃이나 과일을 그린 정물화는 그 아래에 놓였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이 작품은 그 위계를 뒤엎었다.

천상은 없다…로마 뒷골목에 출현한 성인들

카라바조는 1571년 밀라노 부근의 작은 마을 카라바조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부르는 그의 이름은 성이 아니라 고향마을이다. 생전에 그는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라고 불렸고, 후대에는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1475∼1564)와 구별하기 위해 ‘카라바조’라고 기록됐다. 여섯 살이 되던 1577년 밀라노를 휩쓴 역병이 하루아침에 카라바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함께 데려갔고, 열세 살 무렵에는 어머니마저 잃었다. 어린 나이에 그는 예고 없이 가장 가까운 이들을 한꺼번에 잃는 죽음을 겪었다.

밀라노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다가 스물한 살 무렵 카라바조는 로마로 향했다. 로마는 당대 미술의 심장이었고 야심을 가진 젊은 미술가들의 각축장이었다. 무명의 카라바조는 당연하게도 궁핍하게 로마생활을 시작했다. 생계형 일자리로 큰 그림에 들어갈 부분적인 꽃과 과일을 도맡아 그리기도 했는데, ‘과일 바구니’의 놀라운 기량은 이 밑바닥 삯일의 시간 속에서 벼려졌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1599). 서양미술사에 ‘정물화’란 장을 연 혁신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신화나 성경의 서사, 화려한 배경을 다 없애고 과일 바구니 하나만을 세워 오랜 미술사의 위계를 뒤엎었다. 탐스럽고 잘 익은 이상적인 과일·꽃만을 좇던 관례를 깨고 벌레 먹고 병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은 점도 이전과 달랐다. 캔버스에 유채, 46×64.5㎝. 암브로시아나미술관(이탈리아 밀라노) 소장.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1599). 서양미술사에 ‘정물화’란 장을 연 혁신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신화나 성경의 서사, 화려한 배경을 다 없애고 과일 바구니 하나만을 세워 오랜 미술사의 위계를 뒤엎었다. 탐스럽고 잘 익은 이상적인 과일·꽃만을 좇던 관례를 깨고 벌레 먹고 병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은 점도 이전과 달랐다. 캔버스에 유채, 46×64.5㎝. 암브로시아나미술관(이탈리아 밀라노) 소장.
지독한 가난으로 전전긍긍하던 삶의 전환점은 델 몬테 추기경(1549∼1627)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미술에 안목이 높았던 추기경은 거칠고 재능 있는 청년을 거뒀고 마침내 로마 한복판의 큰 무대로 그를 밀어 올렸다.

이런 우연이 한 인간의 생애와 미술사를 바꾸는 순간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델 몬테 추기경의 주선으로 무명의 카라바조가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부속 콘타렐리 예배당에 걸리게 될 ‘성 마태의 부름’(1599∼1600)을 그리게 된 것이다. 카라바조의 명운이 걸린 작품이었다.

‘성 마태의 부름’은 어두운 방 안이 무대다. 그 속에 다섯 사내가 탁자에 둘러앉아 있다. 그들은 돈을 세고 장부를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때 오른쪽 짙은 어둠 속에서 두 인물, 예수와 베드로가 걸어 들어온다. 예수는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무리 가운데 한 사람(수염을 기른 세리 ‘마태’)을 가리킨다. 성스러운 부름의 순간이지만 카라바조가 포착한 것은 부름과 응답 사이의 아득한 틈이다. 세속의 욕망과 성스러운 소명이 한 화면에서 팽팽히 맞선다.

이 그림을 한 시대의 정점으로 끌고 간 부분은 무엇보다 화면 속의 빛이다. 오른쪽 위에서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온 한 줄기 빛은, 화면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의 전신은 어둠에 묻어 두고 그의 손끝을 따라 대각선으로 흘러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동전에 눈을 박고 있는 다른 사내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짙은 어둠을 화면의 주역으로 삼는 이 명암법은 카라바조의 이름과 함께 한동안 유럽회화의 문법이 됐다.

파격은 빛과 구성에만 있지 않았다. 그림 속 인물들은 로마 뒷골목에서 데려온 당대의 얼굴들이다. 신약성경 시대의 복장이 아니라 카라바조 당대에 유행하는 옷을 입고, 깃을 세운 상의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다. 예수와 베드로만이 시대를 초월한 헐렁한 옷차림이어서 두 세계가 한 화면에서 부딪친다. 카라바조는 성스러움을 저 높은 이상의 하늘에서 끌어내려 술집에서나 볼 법한 낯빛의 사람들로 채워 구체적인 현실의 한복판으로 만들었다.

‘성 마태의 부름’과 함께 주문받은 ‘성 마태의 순교’(1599∼1600), ‘성 마태와 천사’(1602)가 차례로 공개된 뒤 카라바조는 확고한 성공가도에 진입했다. 단숨에 로마에서 화제의 중심인물로 떠올랐고, 그림 요청이 밀려들었다. 특히 젊은 화가들이 강렬한 명암과 사실적 인물 묘사에 열광해 그를 모방하기 시작했고 곧 ‘카라바조파’라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토마’(1601∼1602). 카라바조 특유의 극적인 사실주의와 강렬한 명암 대조가 완벽하게 결합한 명작이다. 성경의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화를 바탕으로 부활한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는 도마의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그렸다. 거룩해야 할 성화 속 인물들을 주름지고 고단한 민초의 얼굴로 표현해 당시 엄청난 파격을 일으켰다. 캔버스에 유채, 107×146㎝. 상수시회화관(독일 포츠담) 소장.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토마’(1601∼1602). 카라바조 특유의 극적인 사실주의와 강렬한 명암 대조가 완벽하게 결합한 명작이다. 성경의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화를 바탕으로 부활한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는 도마의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그렸다. 거룩해야 할 성화 속 인물들을 주름지고 고단한 민초의 얼굴로 표현해 당시 엄청난 파격을 일으켰다. 캔버스에 유채, 107×146㎝. 상수시회화관(독일 포츠담) 소장.
그러나 그 찬란한 영예와 뜨거운 인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카라바조 스스로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사고를 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당시 로마에서 그의 이름은 미술과 관련된 기록만이 아니라 경찰 조서에도 빈번히 등장했다. 빼어난 그림을 그리던 바로 그 손으로 사람을 때리고, 허가 없이 칼을 차고 다니다 붙들리고, 시비 끝에 상대에게 돌을 던지고, 명예훼손으로 소송에 휘말렸다. 재능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폭력성도 솟구쳤다. 그는 자신의 성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누구든 저자의 목을 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

1606년 5월 28일 카라바조는 로마의 좁은 골목에서 한 사내와 맞붙었다. 오랜 원한이었다고도 하고 내기였다고도 하나 그 이유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짧고 어지러운 난투 끝에 상대편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카라바조도 머리에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고는 하지만 잠시 뒤 사내는 숨을 거두고 카라바조는 그 순간 살인자가 됐다. 그날 밤에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도망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청은 그에게 ‘반도 카피탈레’를 선고한다. 누구든 그를 알아보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로마 전역에 걸린 사형선고였다.

이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4년은 처절하다. 카라바조는 나폴리로 달아났다가 지중해를 건너 몰타섬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사고를 일으켜 투옥되고 축출됐다. 다시 시칠리아를 떠돌다가 나폴리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정체 모를 무리에게 습격을 당해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다. 사면을 얻어 로마로 돌아가기를 필사적으로 바랐던 카라바조는 유력자들의 손을 빌려 그 길을 뚫으려 했다. 마침내 사면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드디어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로마의 흙을 밟지 못했다. 토스카나 해안의 작은 항구에서 열병으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1610년 서른여덟 살이었다. 사인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다. 열병이라지만 그 정체를 두고 패혈증·말라리아, 혹은 납 중독이란 추측들이 있고, 그가 살해한 자의 가문이 보복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카라바조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카라바조의 초상. 동시대 활동한 화가인 오타비오 레오니(1578∼1630)가 카라바조 사후 10여 년이 지난 1621년경 그렸다. 이 초상화는 1994년에 이탈리아에서 발행한 10만리라 지폐 앞면에도 쓰였다. 종이에 드로잉, 23.4×16.3㎝. 마루첼리아나 도서관(이탈리아 피렌체) 소장.
카라바조의 초상. 동시대 활동한 화가인 오타비오 레오니(1578∼1630)가 카라바조 사후 10여 년이 지난 1621년경 그렸다. 이 초상화는 1994년에 이탈리아에서 발행한 10만리라 지폐 앞면에도 쓰였다. 종이에 드로잉, 23.4×16.3㎝. 마루첼리아나 도서관(이탈리아 피렌체) 소장.
카라바조의 천재성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툭하면 주먹싸움에 끼어들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던 기질은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의 천재성과 기질이 끝내 서로 돕지 않았다는 것이다. 밝은 벽 앞 벌레 먹은 과일부터 어두운 방에 들이닥친 빛에 동전을 세다가 놀란 얼굴까지 카라바조가 화면에 담고자 한 것은 미화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거리에서 뒤엉킨 채 싸움을 했던 그는 어둠으로부터 빛을 만들어냈다. 그 의미는 또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구원을 염원했던 것일까. 빛처럼 나아가고 싶었을까. 하지만 적어도 카라바조의 생애 속에서 최후의 빛은 끝내 그를 비켜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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