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국정원부터 경찰까지…제주해군기지 추진, 조직적 인권침해 있었다

박기주 기자I 2019.05.29 12:00:00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결과 발표
강정마을 찬반투표 투표함 탈취 등 준비단계서부터 개입
국정원·해군·기무사·경찰·제주시 등 범정부 차원서 조직적 공작
시위 진압 과정서 폭력·욕설 등 인권침해

유남영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이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브리핑룸에서 지난 7개월간 조사한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사건의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이데일리 박기주 기자]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유치 과정에서 청와대를 비롯해 국정원과 해군, 경찰, 제주시 등 정부의 조직적인 공작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의 경우 반대 시위를 진압하면서 폭행과 욕설 등 인권침해 행위를 한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다만 이를 조사한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경찰이 정부가 제주해군기지 선정과 건설을 위한 모든 계획을 세워놓은 뒤 방패 역할만 한 것으로 봤다. 범정부 차원의 조사가 추가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투표함 탈취 등 제주해군기지 선정 준비 단계부터 해군 개입

진상조사위는 29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 7개월간 조사한 내용이다.

지난 2007년 제주해군기지 건설 지역을 제주도 강정마을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가 있었고, 해군이 이에 개입했다는 논란이 발생한 바 있다. 또한 제주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주민 및 활동가들에 대해 경찰이 폭력 등 과격하게 대응한 사실도 논란이 됐다. 이는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오랜 기간 논란이 이어졌고, 이 문제로 체포·연행된 사람만 모두 697명에 달한다.

이에 대해 진상조사위는 △제주해군기지 유치 및 결정 과정 등에서 절차적·민주적 공정성이 지켜졌는지 △해군기지 건설 결정 이후 제주도·해군·국가정보원·경찰청 등 유관기관의 활동이 적정했는지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과 활동가에 대한 경찰 및 유관기관의 대응이 적정했는지 등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봤다.

우선 강정마을이 제주해군기지 지역으로 선정되는 데에 공정성이 결여됐다는 게 진상조사위의 판단이다.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한 강정마을 임시총회(2007년 4월 26일)는 향약에 따른 총회 소집공고와 안내방송이 없었고, 총회 의제가 공식적인 절차 없이 변경돼 상정된 사실이 확인됐다. 여기에 제주도에서 실시한 해군기지 후보지 선정 여론조사는 조사 대상이 제주도민 전체로 설정되는 등 해당 마을의 여론 반영이 사실상 배제됐다. 후보지 선정을 위한 사전 작업에 이미 하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해 6월 진행된 해군기지 찬반 결정 강정마을 주민투표에서 반대 여론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해군제주기지사업단 단장은 마을회장과 해군기지에 우호적인 해군기지사업추진위와 사전 모의했고, 결국 사업추진위의 지시를 받은 해녀들이 투표함을 탈취하면서 주민투표가 무산된 상황이 벌어졌다. 8월에 진행된 주민투표에서는 투표 당일 주민들을 버스에 태워 관광을 시킨 후 투표가 끝난 시간에 귀가하게 하기도 했다.

◇국정원·해군·경찰·제주 등 정부의 조직적 공작 정황 발견

해군기지 유치 반대위원회의 활동을 약화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공작이 있었던 사실도 확인됐다.

국정원 제주지부 정보처장과 제주경찰청 정보과장, 해군제주기지사업단장, 제주도 환경부지사 등은 2008년 9월 제주도 한 식당에서 모여 해군기지 반대 활동에 대해 공권력을 동원한 강경 진압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의 주요 대화 내용은 해군기지 건설 반대활동 측에 엄격한 법집행을 해야 한다는 것, 반대 측을 인신 구속해야 한다는 것, 걸림돌은 제거하고 가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국정원과 기무사 등은 제주해군기지 반대 활동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경찰에 압박을 가해 해군기지 반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제압하도록 한 정황도 드러났다.

당시 제주경찰청 소속 간부들은 진상조사위 조사에서 “국정원이 가장 상부에서 상황이나 조치에 대한 지휘를 하고 있었고, 경찰은 위법성이 다분히 포함된 조치나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들은 또 “국정원과 기무사에서 작성한 제주 경찰에 대한 첩보가 청와대로 들어가 다시 경찰청을 거쳐 내려오는 내용이 경찰에겐 압박이 될 수밖에 없었다”며 “해당 첩보가 ‘서귀포 경찰서장 누구누구는 성격이 온순해 집회시위 상황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다’는 식의 인물 정보 위주여서 서장들이 위로부터 압박을 많이 받았다”고도 말했다.

◇경찰, 반대 집회 과정서 폭력·욕설 등 인권침해 행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측과 경찰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2011년부터는 경찰과 해경 등 공권력이 인권을 침해한 행위가 다수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반대 측 사람들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폭행 혹은 욕설을 했고 신고된 집회를 방해하거나 무분별한 강제연행,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시위대 해산 등 과잉진압과 인권침해 행위를 했다. 해군은 해상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폭행하거나 보수단체 집회를 지원한 행위가 드러났다. 해경 역시 해상에서 해군기지 반대 측 사람을 폭행하거나 고의적으로 카약을 전복시키는 등 인권침해 행위를 했다.

특히 청와대와 국군사이버사령부, 경찰청이 조직적으로 제주해군기지 반대 여론에 대응하는 ‘댓글 부대’를 운영한 정황도 조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다만 진상조사위의 업무 범위가 경찰권 행사의 인권침해 여부로 한정돼 있어 당시 제주도지사 및 환경부지사, 국정원과 기무사 등 관계자에 대한 조사는 진행되지 못했다. 진상조사위 관계자는 “이들에 대한 협조 공문을 보냈으나 해당 기관이 아무런 회신을 하지 않아 진상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진상조사위는 정부와 제주도 및 여러 국가기관이 해군기지 설립을 반대한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진상을 규명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함께 경찰청에는 유사 사건 재발 방지 및 인권 증진을 위한 제도 및 정책의 개선을 권고했다.

유남영 진상조사위 위원장은 “이 사건에서 경찰은 방패 역할을 한 셈이어서 방패를 들고 있었던 기관이나 행위자에 대해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며 “하지만 권한 상 현직 경찰관에 대한 조사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직 혹은 다른 기관장에 대해서는 자발적인 협조 없이는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점 때문에 다른 사건과 달리 정부와 제주도에서도 진상을 규명해줄 것을 촉구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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