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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한평생 시대와 불화하는 삶을 사는 이가 있다. 그것도 단지 보편적 견해에 대한 이견 정도가 아니라 ‘미치광이’로 불릴 정도라면 과연 그 생은 얼마나 외롭겠는가. 차마 가늠도 안 되는 그런 처지에 놓였던 남자가 있다. 생애 내내 봤다는 ‘환시’에 대한 투철한 신념, 그 신념을 그림과 글로 설명하는 일을 소명으로 여겼으나 세상은 그 전부를 의심했다. ‘완전히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면서.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는 계몽주의와 이성이 시대정신이던 때 환시를 보는 광인으로 불리며 일생을 살았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환시가 펼쳐낸 세계관을 가졌고, 그것을 글로 쓰고 판화작품으로 남겼다. 당연하게도 그 일은 세상 사람들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블레이크의 환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 네 살 무렵 어느 날 블레이크는 창가에서 비명을 질렀다. 무엇을 봤느냐고 묻자 아이는 신이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고 대답했다. 여덟 살의 블레이크는 들판에서 나무 한 그루를 봤는데, 그 나무에는 천사가 가득 차 있고 가지마다 천사의 날개가 별처럼 매달려 반짝이고 있었다. 어린 블레이크는 집으로 달려가 본 것을 말했지만 아버지는 거짓말을 한다며 매를 들었다. 얼마 뒤 블레이크는 들판에서 예언자 에스겔이 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맞았다. 여기서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본 것을 말하면 맞는다.’ 그럼에도 그는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침묵으로 타협을 배울 최초의 기회를 버렸고, 생을 마감하던 일흔 살까지 올곧게 자신이 본 것을 세상에 말하고자 했다.
“내가 본 걸 말하면 맞는다”…침묵으로 타협하지 않은 ‘환시’
블레이크는 영국 런던의 양말 장수 아들로 태어났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울 만큼만 학교를 다니다가 열 살에 그만뒀고 나머지 교육은 어머니에게서 받았다. 대학은 물론이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는 문법학교의 문턱도 밟지 못했다. 집 안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성서였다. 그는 성서를 읽고 또 읽었다.
열네 살에 블레이크는 판화가의 도제로 들어가 7년을 보냈다. 판화의 도제수업이란 것이 손의 정확성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훈련이라 선 하나가 어긋나도 판 전체를 버려야 한다. 덕분에 그는 스물한 살 무렵 이미 실수를 허락하지 않는 손을 갖게 됐고, 스물 두 살에 영국 최고의 미술교육기관인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왕립미술학교는 당대 최고의 화가라 불리던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가 원장으로 있으면서 화풍을 지배하던 곳이었다. 레이놀즈가 가르친 것은 여러 대가의 장점을 절충해 부드럽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이르게 하는 화법이었는데 블레이크에게 그것은 진리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졌다. 그는 보편적인 가르침을 거부했고 왕립미술학교를 그만뒀다. 20대 초반에 제도권에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던 어쩌면 유일했던 기회를 그는 미련없이 걷어찼다. 30년이나 지난 훗날 블레이크는 레이놀즈의 강연집을 손에 넣었고 여백에 그에 대한 반박을 빼곡히 적어 넣었다. “이 자(레이놀즈)는 예술을 억누르기 위해 고용됐다. 일반화하는 것은 백치가 되는 일이다. 개별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탁월함의 표지다.”
왕립미술학교에 다니는 것을 중단한 이후 블레이크는 자신의 판화공방을 운영했다. 각종 인쇄물을 의뢰받고 납품하는 생계활동을 하면서도 자신만의 판화에 시와 그림을 함께 새겼고 그것을 책의 형태로 만들었다. 사실 그 내용은 ‘예언서’ 혹은 ‘신화’라고 불리는 게 마땅할, 세계의 기원과 현재,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1794년 그는 ‘유럽, 하나의 예언’이란 책의 첫 장을 한 노인의 형상(‘태초부터 계신 분’ 1794)으로 열었다. 거대한 황금빛 태양의 원반 안에서 백발 노인이 몸을 웅크린 채 아래를 향해 팔을 뻗고 있는데, 그 손에는 컴퍼스가 들려 있다. 중세 이후 창조주가 컴퍼스를 들고 세계를 재는 도상은 하나의 확립된 전통이었다. 그러니 표면상으로 그것은 천지창조의 순간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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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블레이크는 같은 몸짓을, 다른 인물 ‘뉴턴’(1795)에게 옮겨 놓았다. 깊은 바닷속 바위에 앉아 있는 과학자 뉴턴은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 컴퍼스로 삼각형을 그리고 있다. 뉴턴이 몸을 기대고 있는 왼편의 바위에는 이끼인지 산호인지 광물인지 알 수 없는 무늬들이 형언할 수 없는 색채로 펼쳐져 있다. 하지만 뉴턴은 그 실제의 세계가 보여주는 무한한 향연을 등지고 앉아 오로지 자신이 그은 세 개의 직선만을 응시하고 있다.
창조주와 뉴턴, 두 인물을 그린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블레이크가 가졌던 세계관이 완성된다. 하늘에서 컴퍼스를 든 신, 바다 밑에서 컴퍼스를 든 과학자는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신학과 과학이 측량이란 하나의 몸짓에서 만난다는 의미다. 여기에 블레이크가 평생 겨눈 표적은 컴퍼스, 신이든 과학자든 그것을 쥔 자가 세계를 구획하는 순간 잘려나가고 마는 것들이 있다고 블레이크는 생각했던 것이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자면 블레이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틀렸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가 비판하고자 한 것은 뉴턴이란 이름이 대표하는 하나의 세계상, 과학적 합리성이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는 태도였다. 인식의 능력이 아닌 사실로부터의 이탈로 상상력을 격하하는 순간, 인간은 자기가 만든 좁은 방 안에 갇힌다고 여겼던 것이다. 무한한 것을 지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이다.
컴퍼스 모티프로 ‘시대 권력’에 완강히 저항
블레이크는 무신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생 성서를 유일한 근거로 삼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교회의 도덕법이 인간을 결박한다고 봤고, 신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년에 그를 찾아온 한 법률가가 예수의 신성에 대해 묻자 블레이크는 예수가 유일한 신이라고 대답했다. 법률가가 안도하려는 순간 그는 태연히 덧붙였다. 나도 그러하고, 당신도 그러하다고. 정통 신앙의 눈으로 보면 신성모독이고, 무신론의 눈으로 보면 광신이었다. 블레이크는 그 양쪽 어디에서도 집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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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8월. 블레이크는 죽는 날까지 판화에 매달려 있었다. 문득 지치는 느낌에 자리에 누웠고 침상 곁에서 울고 있는 ‘유일한 지지자’인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로 있어줘. 내가 당신의 초상을 그릴 거야.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천사였으니까.” 숨을 거두기 직전 그의 얼굴이 환해졌고, 눈이 빛나기 시작했으며, 천국에서 본 것들을 말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36년이 지난 1863년 알렉산더 길크리스트가 펴낸 전기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애: 무명의 화가’란 제목을 달고 있다. 당대 블레이크는 ‘무명의 화가’였다. 그러나 이 책이 영국 라파엘전파에 영향을 줬고, 시인 예이츠가 읽었으며, 20세기가 마침내 그를 재발견했다. 돌아보면 블레이크는 후대의 인정을 기대하며 당시의 조롱을 견딘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누가 뭐라든 자신이 본 것을 말하는 편을 택했다. 그래서 그의 인생에 연민의 마음이 생기진 않는다. 자신이 본 것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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