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진철 기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전자(005930)에 대해 지배구조 개편이 포함된 주주제안을 하면서 삼성 측의 향후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엘리엇이 지난해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극한 분쟁을 치렀던 상대라는 점에서 삼성전자가 외국계 헤지펀드와 심각한 대립각을 세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반면 이달 말 임시주총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과 맞물려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이 속도를 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엘리엇이 요구하는 사항들이 삼성전자 측에도 나쁘지 않다는 분위기다. 삼성이 직접 말하기 어려운 문제를 엘리엇이 나서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해 지주회사 전환에 대한 명분을 세워준 셈이다.
6일 업계에 따르면 엘리엇은 지난 5일 오후 삼성전자에 보낸 ‘주주가치 증대 제안서’라는 서신을 통해 삼성전자 지분 0.62%(지분가치 1조4000억원)를 보유하고 있다며 △삼성전자의 인적분할(삼성전자 홀딩스-삼성전자 사업회사) △전자홀딩스+삼성물산 합병 △30조원의 특수배당(또는 1주당 24만5000원 배당, 배당수익률 15.1%) △삼성전자 사업회사의 거래소 및 나스닥 공동 상장 △독립적 3인 사외이사 선임 △금산분리(전자지주, 금융지주 설립) 등을 제안했다. 여기에 삼성전자가 분할을 하지 않는다면 보유 중인 자사주 13.0%를 소각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엘리엇의 주주제안에 대해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엘리엇은 미국의 억만장자 폴 싱어가 운영하는 미국의 행동주의 헤지펀드다. 엘리엇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0.62%에 불과하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전체 외국인 지분은 60%에 달한다는 점에서 엘리엇이 다른 외국계 투자자들과 세규합에 나설 경우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엘리엇은 지난해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기존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임시주총에서 표대결까지 치달으며 삼성측과 분쟁을 벌인 바 있다.
반면 엘리엇의 이번 요구가 삼성전자가 앞으로 추진해야 할 지배구조 강화를 위한 사업재편과 주주가치 제고의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시각도 제기된다. 엘리엇의 주주제안이 삼성전자의 향후 행보에 명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오는 27일 임시주총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등기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처리할 예정이다. 이 부회장이 등기이사 선임은 책임경영을 강화하겠다는 의미로 향후 지배력 강화를 위해서도 사업구조 재편에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시장에서는 지난해 삼성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통합 삼성물산의 대주주에 오른 이 부회장이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삼성전자의 분할을 통한 지주사 설립 가능성을 제기해 왔다.
증권가의 한 애널리스트는 “삼성의 그간 사업재편이 오너일가의 후계구도를 위한 지배력 강화라는 비판적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엘리엇의 이번 회사분할 요구는 주주의 제안이라는 점에서 삼성 입장에서는 향후 사업재편의 명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엘리엇의 배당확대 요구도 삼성전자가 그동안 추진해온 주주가치 제고 방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보통주와 우선주 1주당 각각 1000원의 현금배당을 결정했다. 배당금 총액은 1415억원 규모다. 또한 주주환원 차원으로 지난해 10월부터 4회에 걸쳐 진행한 11조3000억원 규모의 특별자사주 매입 및 소각 프로그램을 지난달말 모두 완료했다. 따라서 삼성전자가 엘리엇의 요구룰 완전히 수용하지 못하더라도 주주가치 제고 차원에서 향후 배당성향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할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게 시장의 예상이다.
다만 엘리엇이 요구한 사외이사 수를 늘리는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경영투명성 강화를 모색할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정기주총에서 이사회 결의를 거쳐 사외이사도 이사회 의장이 가능하도록 정관을 변경했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과거와 달리 엘리엇은 삼성과 대립각을 세우기보다 삼성전자와 오너일가가 이룬 업적을 지지하고, 지주사 전환을 통한 오너 일가의 지배력 확대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며 “엘리엇은 삼성전자 저평가 해소를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상 삼성이 스스로 꺼내기 힘들었던 삼성전자 인적분할과 지주사 전환의 명분을 세워준 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