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 모드는 프랑스24 방송에 자신이 거리에 나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또 다른 시위 참가자는 “나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며 민주주의가 무의미해지는 것에 대항할 것”이라며 “우리가 대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질려버렸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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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시위대에 불길 휩싸인 거리
연금개혁을 둘러싼 프랑스 사회 갈등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개혁을 강행하면서 단순한 연금개혁 찬반 논쟁을 넘어 정부 퇴진 문제로 갈등이 격화했다. 마크롱 정부는 연금개혁 후퇴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24와 프랑스 내무부 등에 따르면 23일 프랑스 전역에선 108만명(노조 추산 350만명) 넘는 사람이 연금개혁 등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파리에서만 11만9000여명이 거리에 나왔다.
이날 시위는 어느 때보다 거셌다. 시위대는 상점을 습격하고 관공서와 공공기물에 불을 질렀다. 거리에 주차된 차량은 뒤집어엎었다. 프랑스 당국은 곤봉과 최루탄, 물대포로 무장한 경찰과 헌병 등 진압병력 약 1만2000명을 투입해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다. 시위대와 진압병력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부상자도 속출했다.
이날 노조가 총파업을 단행하면서 국가 기능도 마비돼 가고 있다. 파리 지하철 노선 14개 중 2개만 정상 운행됐고 TGV(테제베) 고속열차 운행량도 절반이 줄었다. 파리 오를리공항에서도 항공편 30%가 취소됐다. 에펠탑과 베르사유 궁 관람 또한 파업으로 중단됐다. 정유업계 파업으로 기름이 동난 주유소도 15%에 이른다.
연초부터 시작된 연금개혁 반대 시위는 16일 마크롱 대통령이 긴급법률제정권(하원 표결 없이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법률을 제·개정할 수 있는 권리)을 발동, 연금 개혁을 발동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연금 재정 건전성을 지키기 위해선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연금개혁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20일 하원에서 내각 불신임 개혁안이 부결되면서 현실적으로 연금개혁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사라졌다.
연금개혁에 대한 반대 여론은 이로 인해 노동 기간이 길어진 청년층과 장기간 근로에 불리한 육체 노동자, 경력 단절 여성 사이에서 특히 크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퇴직교사 실비 블레디르는 “마크롱은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는 대신 연금을 받아야 하는 필수 근로자들에게 2년 더 일하라고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노조 강 대 강 대치…28일 추가파업 예고
정부와 노조 등은 강(强) 대 강 대치를 이어갈 태세다. 전날 마크롱 대통령은 TF1, 프랑스2 방송에 출연해 “프랑스 경제는 수십 년간 약해지고 있고 복지 정책을 강화하면서 (복지에 대한) 권리는 증가하고 있다”며 “연금개혁을 통해 프랑스의 경제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말에는 연금개혁을 시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엘리자베트 보른 프랑스 총리는 이날 시위에 대해 “반대 의견을 밝히고 목소리를 내는 건 권리”라면서도 “오늘 봤던 폭력과 파괴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자신의 트위터에 썼다.
프랑스 8개 노조는 28일 추가 파업을 예고했다. 온건 성향 노조인 민주노동동맹(CFDT)의 로랑 베르제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대통령은 (연금) 개혁을 보류해야 한다”며 연금개혁 철회나 연기를 주문했다.
이번 사태가 장기화하면 마크롱 정부도 고립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마크롱 정부의 최대 정치적 위기였던 2018년 ‘노란 조끼 시위(유류세 인상 반대 시위)’가 재현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당시 마크롱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소득세 인하 카드를 제시했지만 결국 2020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최근 마크롱 정부 지지율은 28%(19일 Ifop 조사)로 2019년 이후 최저치로 하락했다. 24일 설문조사에선 응답자 중 70%가 “마크롱 대통령이 상황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 정치평론가인 클로에 모랭은 “마크롱은 이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며 “정부로선 시위에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며 다음 상황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