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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삶이 언제나 내게 미소 지었던 것은 아니지만 난 언제나 삶을 향해 먼저 미소 지었다.”
세상에 즐겁기만 한 인생이 있을까. 누구나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있고 세상이 나를 향해 좀처럼 웃어 주지 않는 시절이 있다. 그런데도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1877∼1953)는 세상이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자신이 세상에 더 친절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피의 이런 태도는 고난을 모르는 자의 순진한 낙관이 결코 아니었다.
뒤피는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형제가 많은 가난한 대가족의 아이로 태어났다. 회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했다. 뒤피는 그림을 좋아했으나 온전히 매달릴 형편이 못 됐다.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커피를 수입하는 회사에 나가 일해야 했고, 열여덟 살 무렵부터 하루가 저문 뒤 르아브르미술학교의 야간반에서야 겨우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화가가 되는 길은 그에게 처음부터 훤히 열린 길이 아니었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어떻게든 밝게 살자
스물세 살에 파리로 나와 가까스로 자신만의 화풍을 찾은 뒤에도 세상의 평가는 오랫동안 인색했다. 화면이 너무 밝고 경쾌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동시대 비평가들은 뒤피의 그림을 한낱 장식적인 것으로, 시대의 고민과는 무관한 가벼운 것으로 봤다. 미술 그 자체의 혁신적 논리나 인간의 소외·불안을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을 진정한 예술로 여기던 시대에 밝은 화풍은 철없고 깊이가 없다는 평가로 돌아왔다. 옷감이나 도자, 벽지의 무늬를 디자인하는 일에도 즐겨 참여한 뒤피의 이력은 순수회화의 세계에서 오히려 그를 한 급 낮은 자리로 밀어내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만년에는 다발성 관절염을 앓았다. 손가락 마디가 굳고 뒤틀리는 병이었다. 화가에게서 손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보다 잔인한 형벌은 없을 것이다.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랬듯이 뒤피 역시 굳은 손가락에 붓을 끈으로 묶어 맨 채 화면 앞에 앉았다. 손의 감각을 되찾으려 대서양을 건너 미국 보스턴까지 가서, 당시로선 실험적이던 호르몬 치료를 받기도 했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52년에야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회화부문 대상을 받았고 이듬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의 자취를 정작 그의 그림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굳은 손끝에서 나온 만년의 화면들조차 여전히 맑고 가벼웠다. 세상이 그에게 건넨 것과 그가 세상에 돌려준 것은 그렇게 끝내 어긋나 있었다. 고난이 있어도,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이라면 그 한 번을 어떻게든 밝게 살아가자고 결심한 이의 낙관이었다. 그래서일까. 뒤피의 그림 앞에 서면 먼저 마음이 가벼워진다.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소로 풍경을 바라봤던 뒤피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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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피의 이 그림은 한 다발의 꽃을 그린 평범한 실내 정물화로 보인다. 그러나 화면 아래 적힌 그 한 줄 덕분에 이 장밋빛 방은 벽지도 액자도 탁자도, 방을 이루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그림은 화가가 자신의 지난 삼십 년을 회고하는 내용이고, 정물화가 아닌 얼굴이 없는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뒤피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나의 삼십 년, 아무도 반기지 않을 때조차 미소를 지었던 그 삼십 년은 장밋빛이었다’고.
화면에 명기된 1901년은 뒤피가 파리 화단에 처음으로 등단한 해다. 그는 그해 살롱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완전한 무명작가로 시작했지만 이후 인상파 작가들의 자유로움을 보며 감탄했고, 앙리 마티스의 작품들 앞에서 색채의 해방을 목격하곤 큰 충격을 받았다. 이윽고 맑은 색면에 속기하듯 빠른 선을 얹는 자신만의 화법에 다다랐다. 그로부터 삼십 년 뒤 뒤피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화가가 돼 이 장밋빛 방을 그렸던 것이다.
이 그림이 뒤피 인생에 대한 자축의 의미를 가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방을 감싼 벽지와 액자 속 정물화의 무늬가 뒤피 자신이 손수 디자인한 실제 직물의 문양이어서다. 한때 수많은 텍스타일 패턴을 그렸던 그는 여인들이 몸에 두르는 옷감과 방을 감싸는 커튼의 문양을 만드는 일을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보다 조금도 낮게 여기지 않았다. 순수회화와 장식미술 사이의 위계라는 것을 애초에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술은 사람들의 식탁 위에서, 거리의 풍경 속에서, 일상의 직물 위에서 함께 숨 쉬어야 한다고 믿었다.
니스에서 빛 탐구…방안 가득 번진 ‘뒤피의 파랑’
삼 년쯤 앞서 그린 ‘열린 창, 니스’(1928)에서는 이 감각이 바깥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열린 창’은 그저 실내와 실외를 가르는 물리적 프레임이 아닌, 안과 밖이라는 다른 세계가 경계 없이 스며드는 지점이다. 화면은 중앙의 전신 거울장을 축으로 세 개의 수직 공간으로 나뉘는데 왼쪽에는 수평선이 아득히 열린 짙푸른 지중해와 리드미컬하게 부서지는 파도가 있고, 오른쪽에는 종려나무가 늘어선 니스 해변의 산책로와 주황빛 도시의 건물들이 있다. 그 사이에 놓은 중앙의 거울은 창밖 풍경을 가로막는 대신 화가의 등 뒤에 있을 아틀리에를, 이젤과 빈 의자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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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와 도시, 그에 면한 아틀리에. 자연과 사회와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는 저마다 독립된 성부로 울리면서도 하나의 화음을 이룬다. 뒤피는 은둔자처럼 방 안에 웅크리지도, 자연 속에 자신을 잃지도 않았다. 세계의 모든 요소를 캔버스 위에서 동등하게 환대하는 것 같다. 다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일은 사진의 몫이고, 화가의 몫은 자연이 우리 망막에 던진 찬란한 인상을 다시 지어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내 눈은 세상의 추한 것을 지우기 위해 태어나”
뒤피는 어둠과 비극을 그리는 일은 오히려 쉽다고 여겼다. 정작 어려운 것은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힘이고 그것이야말로 화가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지난 실패나 어제의 혹평에 매달릴 시간이 없다고도 했다. 내일 그려야 할 새로운 그림이 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은 세상의 추한 것을 지우기 위해 태어났다”는 뒤피의 말은 현실의 외면이 아니라 현실에 맞서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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