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저절로 물드는 장밋빛은 없다 [화폭역정 27]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오현주 기자I 2026.09.11 07:40:03

Google 검색에서 이데일리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시련에 굴하지 않은 기쁨의 색채 '라울 뒤피'
가난한 대가족서 일찌감치 생업에
18세 미술학교 야간반서 그림 배워
20대 간신히 파리서 화풍 찾았으나
비평가 혹평 "화면 너무 밝고 경쾌"
낙관 절정 이룬 최고작 '장밋빛 인생'
화가로 30년 자축…"인생 아름다워"
만년 관절염 고통에도 맑은 그림들

라울 뒤피의 ‘삼십 년 혹은 장밋빛 인생’(1931). 뒤피 특유의 화려한 색채와 기쁨의 정서를 집약한 대표작이다. 짙은 분홍으로 뒤덮인 화면은 단순한 사실적 묘사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뒤피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단의 ‘1901’은 뒤피가 고향 노르망디를 떠나 화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한 해, ‘1931’은 파리에 입성해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30주년이 되던 해다. 지난 세월 되돌아보며 시련 속에서도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확립한 스스로에게 보낸 자축이자 ‘인생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채, 100×81㎝. 파리시립근대미술관(프랑스 파리) 소장.
라울 뒤피의 ‘삼십 년 혹은 장밋빛 인생’(1931). 뒤피 특유의 화려한 색채와 기쁨의 정서를 집약한 대표작이다. 짙은 분홍으로 뒤덮인 화면은 단순한 사실적 묘사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뒤피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단의 ‘1901’은 뒤피가 고향 노르망디를 떠나 화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한 해, ‘1931’은 파리에 입성해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30주년이 되던 해다. 지난 세월 되돌아보며 시련 속에서도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확립한 스스로에게 보낸 자축이자 ‘인생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채, 100×81㎝. 파리시립근대미술관(프랑스 파리) 소장.
저절로 물드는 장밋빛은 없다 [화폭역정 27]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삶이 언제나 내게 미소 지었던 것은 아니지만 난 언제나 삶을 향해 먼저 미소 지었다.”

세상에 즐겁기만 한 인생이 있을까. 누구나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있고 세상이 나를 향해 좀처럼 웃어 주지 않는 시절이 있다. 그런데도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1877∼1953)는 세상이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자신이 세상에 더 친절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피의 이런 태도는 고난을 모르는 자의 순진한 낙관이 결코 아니었다.

뒤피는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형제가 많은 가난한 대가족의 아이로 태어났다. 회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했다. 뒤피는 그림을 좋아했으나 온전히 매달릴 형편이 못 됐다.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커피를 수입하는 회사에 나가 일해야 했고, 열여덟 살 무렵부터 하루가 저문 뒤 르아브르미술학교의 야간반에서야 겨우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화가가 되는 길은 그에게 처음부터 훤히 열린 길이 아니었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어떻게든 밝게 살자

스물세 살에 파리로 나와 가까스로 자신만의 화풍을 찾은 뒤에도 세상의 평가는 오랫동안 인색했다. 화면이 너무 밝고 경쾌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동시대 비평가들은 뒤피의 그림을 한낱 장식적인 것으로, 시대의 고민과는 무관한 가벼운 것으로 봤다. 미술 그 자체의 혁신적 논리나 인간의 소외·불안을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을 진정한 예술로 여기던 시대에 밝은 화풍은 철없고 깊이가 없다는 평가로 돌아왔다. 옷감이나 도자, 벽지의 무늬를 디자인하는 일에도 즐겨 참여한 뒤피의 이력은 순수회화의 세계에서 오히려 그를 한 급 낮은 자리로 밀어내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만년에는 다발성 관절염을 앓았다. 손가락 마디가 굳고 뒤틀리는 병이었다. 화가에게서 손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보다 잔인한 형벌은 없을 것이다.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랬듯이 뒤피 역시 굳은 손가락에 붓을 끈으로 묶어 맨 채 화면 앞에 앉았다. 손의 감각을 되찾으려 대서양을 건너 미국 보스턴까지 가서, 당시로선 실험적이던 호르몬 치료를 받기도 했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52년에야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회화부문 대상을 받았고 이듬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의 자취를 정작 그의 그림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굳은 손끝에서 나온 만년의 화면들조차 여전히 맑고 가벼웠다. 세상이 그에게 건넨 것과 그가 세상에 돌려준 것은 그렇게 끝내 어긋나 있었다. 고난이 있어도,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이라면 그 한 번을 어떻게든 밝게 살아가자고 결심한 이의 낙관이었다. 그래서일까. 뒤피의 그림 앞에 서면 먼저 마음이 가벼워진다.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소로 풍경을 바라봤던 뒤피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40대의 라울 뒤피. 정확한 시기와 찍은 이는 알 수 없다. 1927년 미술잡지 ‘카이에 다르’에 실린 사진이라 그 이전에 촬영한 것으로만 짐작한다. 곁에 놓인 캔버스 속 그림이 야수파에서 입체주의를 거쳐 뒤피만의 화려한 ‘선과 색의 분리’ 화법으로 이행해가던 시기를 보여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40대의 라울 뒤피. 정확한 시기와 찍은 이는 알 수 없다. 1927년 미술잡지 ‘카이에 다르’에 실린 사진이라 그 이전에 촬영한 것으로만 짐작한다. 곁에 놓인 캔버스 속 그림이 야수파에서 입체주의를 거쳐 뒤피만의 화려한 ‘선과 색의 분리’ 화법으로 이행해가던 시기를 보여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한 번뿐인 생을 아름답게 바라보기로 한 뒤피의 선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그림이 있다. ‘삼십 년 혹은 장밋빛 인생’(1931)이다. 벽지와 벽에 걸린 액자 속 정물화의 바탕, 마룻바닥의 나뭇결, 벽 아래 굽도리를 타고 흐르는 빛까지 온통 한 가지 색, 장밋빛의 변주로 이뤄져 있다. 그 한가운데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둥근 탁자 위에는 붉은 장미 몇 송이가 놓였고, 화면 아래에는 1901년과 1931년 사이로 프랑스어 한 줄이 흐른다. ‘30 ans ou la vie en rose’(삼십 년 혹은 장밋빛 인생)라고 말이다.

뒤피의 이 그림은 한 다발의 꽃을 그린 평범한 실내 정물화로 보인다. 그러나 화면 아래 적힌 그 한 줄 덕분에 이 장밋빛 방은 벽지도 액자도 탁자도, 방을 이루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그림은 화가가 자신의 지난 삼십 년을 회고하는 내용이고, 정물화가 아닌 얼굴이 없는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뒤피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나의 삼십 년, 아무도 반기지 않을 때조차 미소를 지었던 그 삼십 년은 장밋빛이었다’고.

화면에 명기된 1901년은 뒤피가 파리 화단에 처음으로 등단한 해다. 그는 그해 살롱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완전한 무명작가로 시작했지만 이후 인상파 작가들의 자유로움을 보며 감탄했고, 앙리 마티스의 작품들 앞에서 색채의 해방을 목격하곤 큰 충격을 받았다. 이윽고 맑은 색면에 속기하듯 빠른 선을 얹는 자신만의 화법에 다다랐다. 그로부터 삼십 년 뒤 뒤피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화가가 돼 이 장밋빛 방을 그렸던 것이다.

이 그림이 뒤피 인생에 대한 자축의 의미를 가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방을 감싼 벽지와 액자 속 정물화의 무늬가 뒤피 자신이 손수 디자인한 실제 직물의 문양이어서다. 한때 수많은 텍스타일 패턴을 그렸던 그는 여인들이 몸에 두르는 옷감과 방을 감싸는 커튼의 문양을 만드는 일을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보다 조금도 낮게 여기지 않았다. 순수회화와 장식미술 사이의 위계라는 것을 애초에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술은 사람들의 식탁 위에서, 거리의 풍경 속에서, 일상의 직물 위에서 함께 숨 쉬어야 한다고 믿었다.

니스에서 빛 탐구…방안 가득 번진 ‘뒤피의 파랑’

삼 년쯤 앞서 그린 ‘열린 창, 니스’(1928)에서는 이 감각이 바깥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열린 창’은 그저 실내와 실외를 가르는 물리적 프레임이 아닌, 안과 밖이라는 다른 세계가 경계 없이 스며드는 지점이다. 화면은 중앙의 전신 거울장을 축으로 세 개의 수직 공간으로 나뉘는데 왼쪽에는 수평선이 아득히 열린 짙푸른 지중해와 리드미컬하게 부서지는 파도가 있고, 오른쪽에는 종려나무가 늘어선 니스 해변의 산책로와 주황빛 도시의 건물들이 있다. 그 사이에 놓은 중앙의 거울은 창밖 풍경을 가로막는 대신 화가의 등 뒤에 있을 아틀리에를, 이젤과 빈 의자를 비춘다.

라울 뒤피의 ‘열린 창, 니스’(1928).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니스의 눈부신 빛을 담은 지중해 풍경을 경쾌하고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1920년대 뒤피는 니스에 머물며 빛을 탐구했고 실내와 실외, 일상과 자연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창을 활용했다. “모든 음영 속에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유일한 색”이라던 푸른색 바탕 위에 스스로 고안한 장식적 드로잉을 절묘하게 녹여냈다. 캔버스에 유채, 65×81㎝. 개인 소장.
라울 뒤피의 ‘열린 창, 니스’(1928).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니스의 눈부신 빛을 담은 지중해 풍경을 경쾌하고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1920년대 뒤피는 니스에 머물며 빛을 탐구했고 실내와 실외, 일상과 자연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창을 활용했다. “모든 음영 속에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유일한 색”이라던 푸른색 바탕 위에 스스로 고안한 장식적 드로잉을 절묘하게 녹여냈다. 캔버스에 유채, 65×81㎝. 개인 소장.
그 무엇보다 이 그림을 하나로 묶는 것은 색이다. 창밖 지중해의 찬란한 울트라마린과 코발트블루는 발코니 난간에 얌전히 갇혀 있지 않다. 그 파랑은 바닥의 카펫으로, 전면의 푸른 탁자로, 옷장의 테두리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온다. 이른바 ‘뒤피의 파랑’이 실내와 실외의 인위적인 단절을 허물며 방 안 가득 번져 나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뒤피가 평생 신념으로 가져 온 하나의 원칙이 있다. 색채는 형태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 빛은 언제나 사물의 외곽선을 넘어 번져 나가며, 색을 윤곽 안에 가두는 순간 그 살아 있는 진동은 죽고 만다는 것이다.

푸른 바다와 도시, 그에 면한 아틀리에. 자연과 사회와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는 저마다 독립된 성부로 울리면서도 하나의 화음을 이룬다. 뒤피는 은둔자처럼 방 안에 웅크리지도, 자연 속에 자신을 잃지도 않았다. 세계의 모든 요소를 캔버스 위에서 동등하게 환대하는 것 같다. 다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일은 사진의 몫이고, 화가의 몫은 자연이 우리 망막에 던진 찬란한 인상을 다시 지어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내 눈은 세상의 추한 것을 지우기 위해 태어나”

뒤피는 어둠과 비극을 그리는 일은 오히려 쉽다고 여겼다. 정작 어려운 것은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힘이고 그것이야말로 화가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지난 실패나 어제의 혹평에 매달릴 시간이 없다고도 했다. 내일 그려야 할 새로운 그림이 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은 세상의 추한 것을 지우기 위해 태어났다”는 뒤피의 말은 현실의 외면이 아니라 현실에 맞서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라울 뒤피의 ‘시골의 음악가들’(1948). 만년의 뒤피가 음악과 전원풍경을 어울린 작품이다. 1940년대 후반 남프랑스 페르피냥과 시골마을에 머물던 뒤피는 야외에서 연주하는 음악가들과 전원생활에 매료됐다. 관절염으로 고통받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시골과 음악이 주는 생명력과 평화로움을 명랑하게 예찬했다. 1948년에 제작한 대형 태피스트리 직조작업을 위해 그린 초안이다. 1963년 뒤피의 부인이 파리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고, 1965년부터 페르피냥의 이아생트 리고 미술관이 위탁 소장·전시하고 있다. 목판에 유채, 22.5×46㎝. 파리국립현대미술(퐁피두센터, 프랑스 파리) 소장. 이아생트 리고 미술관(프랑스 페르피냥) 위탁 소장.
라울 뒤피의 ‘시골의 음악가들’(1948). 만년의 뒤피가 음악과 전원풍경을 어울린 작품이다. 1940년대 후반 남프랑스 페르피냥과 시골마을에 머물던 뒤피는 야외에서 연주하는 음악가들과 전원생활에 매료됐다. 관절염으로 고통받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시골과 음악이 주는 생명력과 평화로움을 명랑하게 예찬했다. 1948년에 제작한 대형 태피스트리 직조작업을 위해 그린 초안이다. 1963년 뒤피의 부인이 파리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고, 1965년부터 페르피냥의 이아생트 리고 미술관이 위탁 소장·전시하고 있다. 목판에 유채, 22.5×46㎝. 파리국립현대미술(퐁피두센터, 프랑스 파리) 소장. 이아생트 리고 미술관(프랑스 페르피냥) 위탁 소장.
즐겁기만 한 인생은 없다. 잘 풀리기만 하는 인생도 없다. 뒤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그림 앞에서, 그의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싱그럽고 맑은 세상으로 초대받는다. 들뜬 걸음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보기 위해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것이 바로 뒤피가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다.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