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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폭풍우 치는 겨울 밤바다 한복판. 한 노인이 증기선의 돛대에 몸을 결박한 채 네 시간째 버티고 있다.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 폭풍이라는 게 대체 어떤 것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두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따름이다. 폭풍우 한가운데 자신을 묶어둔 이는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1775∼1851)다.
터너는 오늘에 이르도록 영국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화가다. 또한 그가 그린 작품 ‘전함 테메레르호의 마지막 항해’(1839)는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이다. 터너의 그 얼굴과 그림의 그 배는 현행 20파운드 지폐의 뒷면을 장식하고 있다. 무엇보다 영국 현대미술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 그의 이름을 빌린 ‘터너상’인 것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1984년 테이트미술관이 제정한 터너상은 영국 태생이거나 영국에서 활동하는 미술가를 대상으로 그해의 가장 빼어난 전시와 작업을 가려 선출해 왔다. 동시대 영국 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발굴하고 국제무대에 알리는 구실을 해왔으며, 수상자는 물론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단숨에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터너의 이름이 두 세기를 건너뛰어 영국 미술의 대표자로 올라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국 미술계의 자존심’이란 뜻이다.
이발사의 아들…가난 비집고 만개한 재능
후대에 인상주의보다 먼저 추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튼 혁신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터너는 1775년 봄 런던 코번트가든의 좁은 골목에서 이발사 겸 가발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소년이던 무렵부터 정신이상을 보이기 시작해 끝내 정신병원에 수용된 채 세상을 떠났고 누이마저 일찍 떠나보내야 했다. 우환이 가득한 집에서 어린 터너는 외삼촌이 사는 템스강변의 작은 동네로, 또 켄트의 바닷가 마을로 보내졌다. 하지만 바로 그 강과 바다의 풍광이 평생 그의 화폭을 떠나지 않는 주제가 됐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묘를 이발소 진열창에 내걸어 싼값에 팔았는데, 가발과 면도비누 사이에 끼워 팔던 그 가난한 그림들 속에 훗날 한 나라가 자랑스러워한 화가의 재능이 피어나고 있었던 셈이다.
재능은 가난을 비웃듯 일찍 만개했다. 열네 살에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왕립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이후 30년간 원근법을 가르치는 교수로 강단에 섰다. 그 공적 영광의 한가운데서 터너가 의지한 단 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30여 년을 아들과 한집에 살며 물감을 갈고 화포를 손질하는 조수로 일했다. 터너가 쉰네 살이던 1829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토록 강인하던 화가의 내면에는 깊은 우울이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부재는 터너를 끝모를 고독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기이하게도 내면의 어둠이 짙어 갈수록 그의 화폭은 도리어 자유롭고 눈부신 변화를 거듭했다. 만년에 이른 터너의 붓은 사물의 윤곽을 차츰 풀어헤쳐 빛과 색채의 안갯속에 녹여 버렸으니, 주위에서 ‘미완성’이라 비웃던 그 흐릿함이야말로 실은 한 거장이 도달한 가장 급진적인 경지였다. 이 황혼의 시기에 터너가 거듭 붙든 주제는 하나같이 소멸과 허무함에 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평생 거울이 돼준 바다는 이제 인간 운명의 덧없음과 죽음을 보여주는 무대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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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밀려 가는 군함 그림…끝까지 팔지 않아
터너의 붓끝에서 이 처연한 예인의 장면은 장엄한 만가와도 같다. 화면의 왼쪽으로 유령처럼 창백한 범선이 십자가처럼 돛대를 곧추세운 채 끌려오고, 그 앞에는 시커멓고 땅딸막한 증기 예인선이 붉은 불꽃과 검은 연기를 토하며 낡은 군함을 끌고 간다. 하늘에서는 태양이 마지막 노을을 불태우고, 가느다란 초승달이 돋아 강물 위에 차갑게 어리고 있다. 노년에 접어든 화가는 빛나는 과거를 등에 진 채 소멸로 떠밀려 가는 저 군함에서 자신의 운명을 봤던 것인가. 터너가 이 그림을 ‘내 사랑’이라 부르며 어떤 값에도 팔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곁에 둔 사실이 그 은밀한 동일시를 말없이 증언한다.
테메레르호가 한 시대의 영광이 저무는 자리를 그렸다면, 몇 해 뒤의 ‘평화―바다에 수장’(1842)은 병든 친구가 바다 위에서 생을 끝내야 했던 장면을 그린 것이다. 터너에게는 데이비드 윌키라는 동료 화가가 있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풍속화가로, 왕립아카데미에서 함께한 오랜 벗이자 경쟁자였다. 1841년 윌키는 성지순례를 하고 돌아오던 뱃길에서 병을 얻어 끝내 회복하지 못했고 지브롤터 앞바다에서 수장됐다.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가족의 임종도 없이 낯선 바다 한가운데로 내려진 벗의 죽음은 터너에게 깊은 충격을 줬고, 이듬해 터너는 그 장례의 밤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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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터너의 흥미로운 역설은 살아가는 방식에 있었다. 그토록 장엄한 감성으로 화폭을 채운 사람이 정작 자신의 생애만큼은 놀랍도록 좀스럽고 또 너절하게 영위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아버지의 부재 이후에는 임시로 사는 것 같은 삶의 형태를 유지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세라 댄비라는 여인과의 사이에 둔 두 딸이 있었고, 좀처럼 이들의 존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40년간 곁에서 살림을 해준 가정부와의 관계도 있었는데, 노년에는 소피아 부스라는 여인과 첼시의 강가 허름한 집에 세들어 살며 ‘부스 씨’ 혹은 ‘부스 제독’이란 가명으로 신분을 감춘 채 살았다. 인구조사라도 나오는 날에는 일부러 배를 저어 템스강 한복판으로 나가 버렸다는 일화가 있고, ‘수전노’라는 세평이 늘 따라다녔다. 말년에는 이가 다 빠져 의치마저 소용없자 하루에 우유 두 쿼트와 그만큼의 럼주로 연명했다고도 전한다.
천상의 빛 그린 손, 지상의 진창 뒹군 발
한편에는 한 시대의 영광과 벗의 죽음을 애도하는 숭고한 화면의 작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가명 뒤에 숨어 셈을 따지고 럼주로 끼니를 때우며 제 핏줄조차 외면한 늙고 이 빠진 한 사내가 있었다. 천상의 빛을 그린 손과 지상의 진창을 뒹군 발이 공존했던 것이다.
1851년 12월, 첼시의 강가 누옥에서 ‘부스 제독’이란 낯선 이름의 남자가 일흔여섯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뒀다. 영국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화가의 생애라기에는 너무도 누추하고 은밀했다. 돌이켜 보면 영광의 정점에서조차 터너는 가명 뒤로, 강가의 셋방으로, 누구의 장부에도 잡히지 않는 자리로 자꾸만 몸을 숨겼다. 어쩌면 바로 그 은둔이야말로 터너가 자기 세계를 지어올린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시선과 인정으로부터 한발 물러선 자리에서 홀로 자신만의 화풍을 끝까지 밀고 나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모순적 삶은 여태 풀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온전히 풀리지 않을 듯하다. 그저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인 작품을 보며 이리저리 추측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