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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장발장' 60대 노숙인에게 보여준 법조인들의 품격[따전소]

송승현 기자I 2024.08.21 14:45:47

신원미등록 노숙인, 국밥 값 내지않아 고소당해
수사 중 주민등록 통해 삶의 토대 마련해준 검사
"피해금액 경미·생계형 범죄" 형면제 판결 판사
"처벌로 삶 바꿀 수 없어" 선처 탄원 국선변호사

[이데일리 송승현 기자] 프랑스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은 굶주림을 해소하고자 빵을 훔쳐 징역 19년을 선고받는다. 이처럼 생계가 어려워 저지른 범죄를 흔히 ‘장발장 사건’이라 부른다. 신원미등록자(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않은 사람)인 60대 노숙인이 배고픔 때문에 국밥을 먹고도 밥값을 내지 않아 기소된 ‘장발장 사건’에서 검사·판사·변호인 모두가 합심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피고인을 위로한 사례가 전해졌다.

신원미등록 60대 노숙인을 변호해 형 면제 판결을 이끌어 낸 김도윤 인천지방법원 국선변호인. (사진=이영훈 기자)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인천지법 형사15단독 위은숙(50·변호사시험 1회) 판사는 지난달 25일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60대 노숙인 이모 씨에게 형 면제 판결을 내렸다. 형 면제 판결이란 범죄가 성립해 형벌권은 발생했으나 일정한 사유로 인해 판사의 재량에 따라 형벌을 부과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이씨의 삶은 기구했다. 이씨는 출생 때부터 부모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며, 이씨의 첫 세상은 부모의 품이 아닌 보육원이었다. 부모님을 비롯해 일가친척 모두가 사망했으며, 맡겨진 보육원도 제대로 된 시설이 아닌 낡고 허름한 곳이었다. ‘출생신고’부터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주민등록’마저도 하지 못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국민이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양육을 받지 못한 탓에 발달장애를 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아원을 나와서도 마땅한 연고지가 없었던 이씨는 어린 나이부터 노숙생활을 시작했다. 긴 노숙생활을 이어간 탓에 굶주림을 극복하고자 경미한 생계형 범죄를 반복했다. 확인된 확정 범죄만 7건이다. 음식점에서 500원 동전을 7만원어치 훔친 혐의로 지난해 징역 1년의 실형을 받고 출소한 이씨는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또 범죄를 저질렀다.

지난 1월 1만원 상당의 국밥을 시키고도 밥값을 지불하지 않은 혐의(사기)로 고소당했다. 이 사건의 주임검사였던 인천지검 남상지(30·변시 11회)검사는 이씨가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걸 확인한 뒤 주민등록 부활을 도왔다. 주민등록 부활로 인해 이씨는 기초연금 등 나라에서 제공하는 최소한의 복지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이 사건을 대리하게 된 김도윤(38·사법연수원 43기) 인천지법 국선전담변호사는 이씨가 자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의견서를 통해 지속적인 감형을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의견서를 통해 “이씨의 잦은 범죄는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는 등 기반이 갖춰지지 못한 채 사회에 정착하기가 힘든 현실이 그 원인으로 강력하게 작용한 것”이라며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될지언정 그 원인까지 이씨를 탓하기는 어려울 때가 적지 않다. 재범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유대와 기반이지, 처벌을 통한 경고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씨의 삶을 바꿀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위 판사도 이같은 취지에 공감해 이씨의 형을 면제해줬다. 위 판사는 “피해금액이 경미하고,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태에서 이뤄진 생계형 범죄”라고 이유를 밝혔다. 전형적인 장발장 사건인 이씨의 사건에서 형벌만이 답은 아니라는 취지로 이같은 판결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이전 재판부도 이씨의 잦은 범죄를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판시하기도 했다. 이씨의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절도) 재판을 담당했던 인천지법 곽경평(54·32기) 부장판사도 당시 판결문을 통해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된 데에는 스스로 생계유지가 어려운 이씨에게 최소한의 복지 혜택도 제공해 주지 못한 국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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