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개혁의 해묵은 과제인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둘러싸고 최근 방송법 개정안이 국회 소관 상임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했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공통의 목표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그동안 다양한 입법이 시도됐지만, 실제 상임위를 넘기조차 쉽지 않았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은 여야를 막론하고 여야 혹은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확보돼야 할 핵심적인 가치로 여겼지만, 막상 실제 관련 법안들의 구체적인 내용, 예를 들면 이사회 정원 확대, 이사의 자격 요건, 이사 추천 경로 등에 대한 정치적 이해의 차이로 개정안의 규정들이 정치적 독립성을 오히려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정치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탓이다.
이번에 상임위를 통과하여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된 방송법 개정안을 두고도 여야를 비롯한 언론계가 극한 의견의 대립을 하고 있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에 따른 개정에 대한 의견의 차이는 충분히 이해할만하지만, 여야 모두가 동일한 목표로 설정한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적 입장이나 관점을 배제하고 보다 객관적 측면에서 방송법 개정안을 평가하거나 입법 방향을 논의하는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닌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묻고 싶다.
현행 방송법은 한국방송공사(KBS)의 최고의결기관으로서 11인으로 구성되는 이사회를 두고, 방송통신위원회가 각 분야의 대표성을 고려해 이사를 추천하면 대통령이 임명하는 형태로 규정한다.
이번 상임위를 통과한 개정안은 독일식 평의회 모델을 참조해 이사회를 운영위원회로 개편하고 운영위원의 수도 21명(최초 발의안에서는 25명)으로 증원하며, 방송통신위원회가 운영위원을 임명토록 했다.
또한 운영위원 추천 권한을 방송 및 미디어 관련 학회, 시청자위원회 등 다양한 주체로 확대하는 한편, 공사에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를 설치해 국민이 직접 공사의 사장후보자를 추천하고 이사회는 특별다수제와 결선투표 방식을 거쳐 사장을 임명 제청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규정의 문구만을 놓고 보면, 현행 규정보다 구체화되고 다양한 운영위원을 구성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방송 및 미디어 관련 학회나 시청자위원회가 본질적으로 정치적 독립성을 갖췄는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해 진정으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방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정말 고민해야 할 것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이 방송·미디어 분야의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하고 본질적인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공영방송을 만들어 방송의 공적 책임을 높이고 시청자 권익보호와 민주적 여론형성, 나아가 국민 문화의 향상을 도모하고 방송발전 및 공공복리를 증진시키기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논의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 그 자체가 입법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방송·미디어 입법의 역사는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의 대립과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정작 정치적 입장에서 벗어나 방송을 시청하는 국민이 중심이 되어 입법을 주도했던 적이 없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모두가 방송·미디어 입법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고, 대의민주주의를 취하고 있는 이상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을 통해 입법 논의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입장이 아닌 국민의 입장과 관점에서 공영방송의 역할과 책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바람직한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것은 방송·미디어의 발전적 미래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또한 방송·미디어 환경이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영향력 확대, 뉴스 소비의 절대적 이용률을 보이는 인터넷 포털, 연령층에 따라 대비되는 언론·미디어 소비 행태, 선호 미디어 차이 등을 고려해야 한다.
KBS와 MBC의 언론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여전히 크지만, 지속적으로 시청률이 하락하고,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 갈수록 공영방송의 시청률이 낮아지고 영향력이 약화하고 있는 점도 고려해 빠르고 복잡하게 변하는 방송·미디어 환경에 대한 종합적이고 다각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공영방송의 거버넌스를 개편하기에 앞서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공영방송의 존재의의를 찾아 재정의하고, 공영방송의 바람직한 역할과 책임을 재정립한 후 그에 맞는 공영방송 재원 조달 방식과 지배구조를 논의하는 것이 올바른 논의의 순서라고 본다.
그러한 논의과정이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국민의 뜻을 제대로 읽고 반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동안의 미디어 개혁 과정이 주로 국회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정쟁을 멈추고 국민의 시간으로 되돌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