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플래시메모리 부문 세계 2위의 도시바(東芝) 반도체 인수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2일 일본경제신문(닛케이)은 도시바가 지난 21일 반도체 자회사 ‘도시바메모리’의 새 주인으로 SK하이닉스(000660)를 포함한 일본 정부 주도 ‘한미일연합’을 낙점했지만 어디까지나 법적 효력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분협력 관계인 미국 반도체 회사 웨스턴디지털(WD)이 자사 동의 없는 매각은 불법이라며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한 상태다. WD 문제를 풀지 않고는 28일 주주총회 전 본계약을 맺는다는 도시바의 계획은 불가능한 일이다. 21일 우선협상대상자를 발표하면서 교섭권 부여 계약을 맺는 대신 이를 ‘약정’한 것도 WD 탓에 계약이 결렬됐을 때의 위약금을 우려한 것이다.
WD는 일본 욧카이치(四日) 반도체 공장을 공동 설립한 합자법인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도시바 반도체 전체 생산의 15%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그 비중도 적지 않다. 도시바는 원래 또 다른 회사인 샌디스크와 협력했으나 WD가 지난해 샌디스크를 인수하면서 새로이 관계가 생겼다. 도시바는 WD와는 직접 구속력 있는 문서에 서명한 적이 없다는 논리로 소송에 대비하는 동시에 WD와의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도시바가 WD와의 갈등이란 ‘시한폭탄’을 남겨둔 채 반도체 매각을 서두른 것은 시간에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미 원자력발전 자회사 웨스팅하우스에서 7조원대 대규모 부실이 발견되며 회사 전체가 2개분기 연속으로 채무 초과 상태에 빠졌다. 매각을 서두르지 않는 한 상장폐지도 기정사실이 된다. 채권은행도 채무 연장을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반도체 매각 추진이란 카드 없인 당장 28일 채권단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도시바는 이 때문에 전날 전체 매각 과정을 내년 3월 이전에 끝내겠다는 계획도 함께 밝혔다. 미국과 유럽의 반독점심사 기간을 고려하면 당장 움직여도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다.
WD는 매각을 무산시키려는 움직임과 함께 미 헤지펀드 KKR을 통해 한미일연합에 합류하려는 움직임도 취하고 있다. WD로선 도시바를 궁지로 몰아넣은 후 자신에 더 유리한 조건으로 한미일연합에 합류하려는 그림을 그리는 모양새다. WD는 전날 도시바의 우선협상대상자 발표 2시간 후 “도시바가 우리의 거부권과 현재 우리가 진행 중인 법적 조치를 무시했다”며 도시바측을 비난했다. 재소를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도 재확인했다. WD는 더욱이 플래시메모리 시장의 경쟁자인 SK하이닉스가 한미일연합에 포함됐다는 점에서 더 불편한 심기를 보이고 있다고 닛케이는 전했다. 낸드플래시 부문 세계 시장점유율은 삼성전자가 35.2%로 1위이며 도시바(19.3%), WD(15.5%), 마이크론 테크놀로지(12.0%), SK하이닉스(10.1%), 인텔(6.9%) 순이다. 이번 인수전의 결과에 따라 지각변동이 불가피하다.
관계자의 눈은 이제 국제중재재판소로 쏠릴 전망이다. 재판소는 오는 7월14일 이 건에 대한 첫 법정심문을 한다. 판단에 따라 당장 이날 WD의 매각 중단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또 재판이 길어지면 도시바의 반도체 매각 절차도 백지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도시바의 채권은행은 벌써부터 한미일연합에 워낙 많은 곳이 참여하면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일각에선 매각이 빨라야 내년 4월 이후가 되리란 전망도 나온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역할에도 관심이 쏠린다. 경제산업성은 이번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과정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로이터통신은 하루 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일본 경제산업상(장관)이 WD에 한미일연합 합류를 제안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