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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의 김응룡 감독(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1990년대 말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선동열과 이종범이라는 두 걸출한 에이스를 모두 일본으로 떠나보낸 뒤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는 말을 남겨 화제가 됐다. 20여년의 시간이 흘러 이제 일본 전자업계가 나라의 간판 역할을 하던 기업들을 해외 기업들에 내주며 비슷한 한탄을 하고 있다. 이들의 운명을 보다 보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낸드 이어 LCD까지..종주국 지위 위협받는 일본 기업들
현재 한창 매각협상이 진행 중인 도시바의 낸드플래시 사업부는 원래 낸드의 원천 기술을 개발한 곳이다. 다시 말하자면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해외에 내주는 셈이다. 도시바는 지난 6월 SK하이닉스(000660) 등이 참여한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으나, 최근 미국의 웨스턴디지털, 홍하이 등과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히며 혼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해외 자본에 종주국 지위를 내어주는 셈이 된다. 그나마 한·미·일 컨소시엄을 일본 정부가 관여하는 산업혁신기구(INCJ)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 위안 거리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에는 LCD(액정표시장치) 분야에서 기술력 최고로 한 때 이름을 떨쳤던 샤프가 맥없이 홍하이에 인수됐다. 한때 ‘하청업체’에 불과하다던 말을 듣던 홍하이에 일본의 자존심을 내줬다는 탄식이 나왔다. 이후 유일하게 일본계 기업으로 남아있는 재팬디스플레이(JDI)도 최근 중국이나 대만의 자본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전에는 D램 제조업체인 엘피다가 미국 마이크론에 흡수됐고, 소형가전과 배터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산요는 중국 자본에 팔렸다.
도시바와 샤프, 엘피다, 산요 등 주요 기업이 잇따라 해외 자본에 매각된 데에는 일본 내 자금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특히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등의 경우 높은 매출을 기록하는 대신 이와 동시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설비투자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일본 내에서는 당장의 매각 자금을 댈 곳도, 향후 동반되는 투자금액을 감당할 기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노즈쿠리’의 역설..변화 앞에 둔감했다
일본 전자업계가 이처럼 어려움을 겪는데에는 역설적이게도 ‘모노즈쿠리’라는 일본 특유의 문화가 작용했다는 평가가 많다. 히타치와 엘피다 등을 거친 반도체 전문가 유노가미 다카시는 자신의 저서 ‘일본 전자·반도체 붕괴의 교훈’에서 일본 전자업계가 지나치게 정밀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삼성전자(005930)에 패배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신기술의 경우 초기에 불량품이 많이 발생해 수율(정상적인 생산품의 비율)이 낮게 나오는데, 변화의 시기에서 일본 업계는 앞선 기술력에 취한 나머지 수율을 높이는데만 주력하다 변화의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 업체들은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일단 양산에 돌입, 일본 업체들보다 빠른 시일 안에 신기술을 먼저 적용했고, 여기서 기술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국내 한 업계 관계자는 “일본은 여러모로 보수적”이라는 시각을 내놨다. 아직도 지방에 가면 파나소닉이 과거 내수용으로 사용하던 ‘내쇼날’ 간판을 볼 수 있다는 사례를 들며, 문제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재의 IT 시장의 속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밀도에 집착하는 경향이 과감한 결단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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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소니는 1975년 비디오테이프 규격 ‘베타맥스’를 최초로 개발했다. 1년 뒤 등장한 마쯔시타의 VHS보다 앞섰고, 소니가 갖고 있던 전자제품 시장 내 입지를 생각하면 곧 시장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후발주자인 VHS는 베타맥스를 시장에서 몰아내다시피한다. 소니는 안정을 택하고 방심하다 후발주자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래도 당시에는 같은 일본 기업들이 경쟁자였지만, 이제는 한국이나 미국, 중국의 경쟁자를 상대하면서 아예 다른 접근법과 변화 속도에 점점 우위를 잃어가고 있다.
이제 일본은 정밀도가 생명인 산업용 로봇과 일부 화학소재, 자동차 등이 강점을 보이고 있지만, 이 또한 다른 국가 기업들의 추격에 시달리고 있다. 일본이 밀려난 자리를 일부 차지한 한국 기업들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특히나 정치권의 요구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검찰 수사를 받는 일부 대기업 총수들을 보면, 거대한 자본을 무기로 한 미국·중국 기업을 상대하며 혁신을 이뤄야 하는 한국 기업인들의 고충을 하루 빨리 해소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