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문주용기자] 지난 5년간 아픔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날입니다.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5년전 오늘밤 IMF구제금융을 정식 요청하면서 IMF사태는 시작됐습니다. IMF사태를 국난이라고까지 하는 까닭은 나라님만이아니라 백성 개개인 모두에게 참혹함을 안겨줬기 때문입니다. 산업부 문주용 기자가 짧은 가족사를 통해 IMF 5년을 되돌아봤습니다.
5년전 오늘, 스탠리 피셔 IMF부총재를 만나고 나서 임창렬 부총리는 구제금융 요청사실을 정식으로 밝혔습니다. 이어 열흘가량이 지난 12월3일. 임 부총리는 저녁9시 TV중계를 통해 210억달러규모의 구제금융 지원을 IMF와 합의했다며 대국민 사과문을 읽어내려갔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고 넘어가야 할 고통의 불가피성을 이해해주시고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시든지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나가는 노력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백성이 어느 곳에 있게 될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수 없다는 뜻일까?
저는 미셸 캉드쉬와 임 부총리의 모습을 처가 가족들과 지켜봤습니다. 이렇게 저는 처가와 함께 IMF를 맞았습니다. 처가 어른 중 한 분이 "캉드쉬 영어발음 한번 엉망이네. 아무리 프랑스 사람이라지만 IMF총재가 발음이 뭐 저래"라고 하셨죠. 영어발음은 어리버리했지만 그가 제시한 긴축정책은 추상 그자체였습니다.
가장 먼저 캉드쉬의 발음을 놀리시던 그 분이 회사를 그만두셔야 했으니까요. IMF사태가 시작된지 며칠 지나잖아서 기업들마다 인원정리 태풍이 불었습니다. 곧 저의 처가에 두번째 실직자가 나왔습니다. 삼성그룹 계열사에 다닌다며 자랑하기도 했는데, 어느 회사보다 먼저 삼성이 먼저 손을 댔습니다.
IMF 위기가 기업들의 과잉투자 때문에 빚어졌다는 분석이 나온 것도 이맘때 같습니다. 반도체 호황이 가져다준 반짝 경기에 도취한 나머지 이기업, 저기업마다 은행돈 빌려서 투자에 나섰다가 빚만 지게됐다는 지적이었습니다. 한보그룹이 무너지고, 기아자동차가 부도나는 등 과잉투자의 산물들이 하나씩 드러났습니다.
얼마있지 않아 또다른 가까운 처가친척이 회사에서 그만뒀습니다. 희망퇴직이라는 희한한 단어가 그때 탄생했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던 그 불안한 시대에 누가 퇴직을 희망하겠습니까마는, 그는 어처구니없이 희망퇴직이라는 역겨운 이름아래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미 정년퇴직했기에 쉬고있던 또다른 처가친척, 다니던 중소기업이 인원조정에 나서는 바람에 사표를 낸 또다른 처가 가족이 방바닥을 긁고 있었습니다. 수년째 계속된 건설경기 침체로 또다른 처가 어른은 수년째 공사장에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98년이 되자 우리의 대마(大馬), 대우그룹이 벼랑끝에 몰렸습니다. 노무라증권 보고서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건 단지 불씨였을 뿐 훨씬전부터 대우그룹은 무너져내리고 있었습니다. 금융권 구조조정도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98년6월말 모처럼 불안감을 잠시 잊고 본가의 형제들끼리 짧은 휴가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난데없이 둘째 형님의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라는 급전이었습니다. "은행 합병이 금방 발표됐다. 우리 은행이 경기은행과 합친대. 나는 내일부터 경기은행 파견나간다. 나중에 합병되면 내 자리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 올라가야겠다" 황망히 서울로 올라간 둘째형님은 근 두달간 경기은행 본점옆의 여관에서 잠을 자야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한 것은 이맘 때였습니다. 저는 두 아이 돌잔치때 들어왔던 반지들을 긁어모았습니다. "나중에 너네들 크면 꼭 갚아줄께"라고 다짐하면서. 또다른 금반지도 냈습니다. 이태전에 돌아가신 선친께서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혹시 돈이 떨어지면 이 반지 맡겨서라도 잠은 따뜻한데서 자라"며 주셨던 정년퇴직 기념반지. 아마 살아계셨으면 이 반지까지 맡기겠다는 제 뜻을 "가상타" 하셨을 겁니다.
저에게 짙은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노조를 이끌고 있었는데, 봐서는 안될 것을 본 것이 화를 키웠습니다. 회사의 자금상황을 알려주는 장부. 진작에 어렵다는 건 알았지만 모기업, 제가 다니는 회사, 다른 계열사의 자금 사정을 보고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그 장부에는 "회사가 살아날 방법은 절대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숫자들만 깨알같이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불면의 밤이 한동안 계속됐습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술취한 채 잠들어도 새벽 5시만 되면 사나운 꿈때문에 눈을 떠야했습니다. 꿈속에서 갓난아이 티를 벗은 둘째아이와 첫째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해 허덕대는 저 자신을 수도 없이 발견했습니다. 더 괴로왔던 건 그렇게 가위눌리고 눈앞이 캄캄했지만 장부 얘기를 아내는 물론, 동료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회사보너스가 끊긴지 수개월이 된 후에도.
존경하는 선배에게 차마 하지못할 말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회사에서 인원정리가 시작됐는데 한 선배에게는 누구도 말을 못했습니다. 이 회사를 나가면 다른 곳에 쉽게 정착할 수 있을 것같은 선배들이야 회사에서 쉽게 말했지만 유독 한 분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선배님,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도와드릴 방법이 없어 죄송하게..." 악역이 저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변의 상황이 더 심각하게 변해갔습니다. 저는 처가, 처이모네 등 주변 다섯 가족을 통틀어 그나마 월급이라도 받아오는 가장이 저 혼자뿐일 정도가 됐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가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처가 친척들은 나름대로 생계 대책을 세우며 재기에 나섰습니다. 처가는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처분해서 신도시로 옮겼고, 처이모 한 분은 낮시간 식당일로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집이 두개면 한개를 팔고, 빚을 얻어 샀던 부동산은 헐값으로라도 내놓아 빚을 갚아나갔습니다.
그렇게 버틴 지 2~3년, 경기가 풀리면서 하나둘 예전의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처가가족과 친척들은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며 더이상 자신을 내쫓았던 회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 장부의 망령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직장을 구했습니다.
IMF 덕분에 고쳐진 것도 있습니다. 실속을 챙기는 자세를 갖게 된 것은 그중 하나일 겁니다. 휘황찬란하고 요란한 술집의 술맛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회사가 언제라도 제 목에 칼을 들이댈 수 있다는 자각도 하게 됐습니다. 때문에 항상 회사가 발전하는 것보다 빨리 나아가도록 자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많은 아픔과 불면의 나날들, 길거리로 내몰렸던 선후배 동료들의 힘겨운 어깨떨림들. 어떤 분은 저보다 더 심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기억들을 우리의 아들, 딸에겐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