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첫 단추’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그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나 기관도 마찬가지일 테고. 처음부터 잘 끼워야 그나마 깔끔한 마무리를 가져올 확률이 높아지는 건, 단추 달린 옷을 입어본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단추, 한 해를 운영할 전시·사업을 소개하는 그 자리가 첫 단추라면, 올해는 운이 없었다. ‘하필’ 그 전날 16건의 위법·부당 업무처리를 조목조목 들춰낸, 문화체육관광부의 특정감사 결과가 발표됐으니. 수많은 눈과 귀가 어디로 향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던 거다. ‘신년 전시’보다 미술관의 ‘한 줄 해명’이 더 궁금했던 거고.
그렇게 여느 해에 비해 ‘순간 관심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덜 중요한 일이어서는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연초에 내놓는 그해 ‘전시·사업 구상’은 미술관 자체의 행보로 보나 한국미술계의 방향으로 보나 가장 중요한 ‘첫 단추’일 수밖에 없다. 상징적·실질적 비중뿐만 아니라 예산과 인력 면으로 볼 때도.
게다가 올해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서울관을 개관한 지 10주년이다. 2013년 11월 문을 연 서울관은 그 이전까지 헤드쿼터이던 과천관과의 정서적 거리감까지 줄여내며 현대미술을 향한 퍼즐을 본격적으로 맞춰나갔더랬다. 이후 2018년 말 ‘보이는 수장고’를 내세운 청주관까지 열며 4관 체제(서울·덕수궁·과천·청주)를 갖췄는데, 그 큰 그림이 낯설지 않았던 것도 서울관에 묵직한 추를 매달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무시할 수 없는 건 관람객 수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 든 관람객은 282만명. 2021년의 165만명보다 117만명이 늘었는데, 미술관이 생긴 이래 가장 많았던 2019년의 274만명을 뛰어넘었다. 팬데믹으로 잠시 늦춰졌던 ‘300만명 돌파’가 눈앞이다. 다시 그 목표를 넘볼 수 있을지는 결국 올해의 전시내용이 좌우하게 될 터. 그 판을 가름할 ‘2023년 전시 라인업’인 거다. 서울관 11건, 과천관 3건, 덕수궁관 2건, 청주관 3건 등 총 19건이 바삐 돌아갈 예정이다.
|
◇미국 가는 한국 실험미술·채색화…‘미술한류’ 2년차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의 무게중심은 ‘미술한류’가 잡는다. 미술한류는 윤범모 관장이 지난해부터 박차를 가한 대표적인 전시사업이다. 국내 관람객만 바라보던 ‘우물 안 개구리’ 식에서 벗어나 한국적 혹은 세계 지향의 콘텐츠를 글로벌하게 내걸어보자는 내용. 여기엔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해외기관과 공동주최하는 새로운 전시, 다른 하나는 이미 국내서 마무리한 전시를 해외기관으로 순회케 하는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1970’ 전(5∼7월 서울관)은 올해 ‘공동주최’의 대표주자가 될 모양이다.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과 의기투합한 전시는 한국 실험미술의 ‘간판’이라 할 작가 26명의 작품·자료 100여점을 내놓는다. 강국진·김영진·성능경·이강소·이건용·이승택·최병소 등 이미 한국미술계를 충분히 달군 작가·장르를 해외에서 검증할 기회인 셈이다. 서울전에 이어 9월 구겐하임미술관을 찍고 내년 2월에는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까지 날아간다.
해외순회전으로는 ‘생의 찬미’와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이 있다. 지난해 6∼9월 과천관에서 한국 채색화의 안팎을 조명한 ‘생의 찬미’는 오는 10월 미국 샌디에이고미술관으로, 2021년 7∼10월 덕수궁관에서 ‘DNA’ 전으로 인기를 끌었던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은 오는 11월 중국 베이징 중국미술관으로 건너간다.
|
◇‘국립’ 장기 보여주는 기획…‘기하학적 추상’ ‘자수’
웬만한 사립미술관이나 갤러리가 따라잡기 힘든, ‘국립’의 장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기획전에는 큰 기대가 쏟아지게 마련. 볼거리나 규모뿐만 아니라 이제껏 없던 담론·경향·지향을 꺼내놓기도 하기 때문인데.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11월∼내년 5월 과천관) 전이 올해는 그 역할을 한다. 김환기·유영국·변영원·서승원·이승조·한묵 등 한 사람, 한 사람이 새긴 붓길은 뚜렷했으나 지속적인 이론·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 시대와 역사를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란 키워드로 처음 돌아보는 자리다.
내용보다 더 큰 의미를 더 챙길 시공간도 예정됐다. ‘동산 박주환컬렉션 특별전’(5∼10월 과천관)이다. 동산 박주환(1929∼2020)이 타계한 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209점 중 주요작을 뽑아 꾸리는 전시는 ‘이건희컬렉션’을 잇는 기증문화 소개전으로서의 의의가 적잖다. 청년시절 액자·족자·병풍 만드는 표구기술로 출발한 박주환은 1961년 동산방을 설립해 정선·심사정·김홍도·신윤복 등 조선시대 거장은 물론, 이상범·천경자·박노수 등 근대대가의 작품을 도맡아 표구했더랬다. 이후 1975년 업종을 전환한 동산방화랑에선 전시·작가 발굴로 한국화 흐름을 주도했다. 박노수·이상범·정은영·김호득 등 근현대한국화역사에서 거를 수 없는 이들의 작품이 공개된다.
‘소외장르’를 진짜 미술관급으로 조명하는 자리도 이어간다. 올해의 부문은 ‘자수’다. 붓과 물감 대신 바늘과 실로 한국 근대미술을 ‘수놓았던’ 자수의 역사를 ‘한국 근대 자수’(가제·11월∼내년 3월 덕수궁관)란 타이틀로 내건다.
|
해외기관이 컬렉션한 ‘게임 소장품’ 10여점을 모으는 독특한 전시도 예고됐다. ‘게임사회’(5∼9월 서울관). 비디오게임이 세상에 나온 50여년 동안 축적한 ‘가상공간의 현실화’를 꾸려보자는 기획이다. ‘게임이 예술품인가’로 이미 논쟁을 겪었던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스미소니언의 소장품도 힘을 보탠다.
◇전시 라인업보다 운영문제 해결이 중요하단 ‘신호’
한국 근대와 현대를 대표하는 굵직한 두 작가의 개인전도 줄 세웠다. 장욱진(1917∼1990)과 김구림(87)이다. 가족·까치·집·마을 등 목가적인 소재로 향토색 물씬 풍기는 소박한 조형미, 단순한 절제미 등을 구현한 장욱진이 ‘근대의 작가’라면, 김구림은 단연 한국 실험미술을 대표한다. 1세대 전위예술가로 영화·비디오아트·무용까지 섭렵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던 터. ‘장욱진’ 전은 덕수궁관(7∼10월)에서, ‘김구림’ 전은 서울관(8월∼내년 1월)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작가와 테마가 줄줄이 대기 중인데도 굳이 ‘첫 단추’ 운운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할 일이 ‘성공적인 전시’에만 있지 않다는 얘기다. 사실이든 구설이든 오해든, ‘감사결과’로 불거진 미술관 운영문제를 진중하게 풀어내야 할 새로운 숙제가 생겼단 소리다. 그 비중은 올해 예정한 19건 전시 그 이상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2023년 예산은 754억원. 이전 해에 비해 68억원 늘었다. 이 비용으로 ‘한국 실험미술’ 전을 미국에 보내고, 서울관 10주년을 기념하고, 소장품을 구입하고, 대전관을 건립하고, 시설보수·유지까지 한단다. 빠듯한 살림일 게 뻔하지만, 국내 미술기관 어디서도 쥐어보지 못한 예산인 건 분명하다. 그러니 움직일 때마다 들끓는 관심을 받는 게 당연할 수밖에. ‘새해 전시 라인업’을 제치고 감사결과에 이목이 집중됐던 건, 정작 중요한 게 뭔가를 알려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하필’이 아니라 ‘마침’ 그날이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