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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권력만 좇은 붓…위대한 화가, 비루한 종말 [화폭역정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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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기자I 2026.10.16 07: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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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위해 예술한 역사화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
프랑스 왕립 장학생으로 伊 로마서 유학
귀국 뒤 왕실 주문받는 '유럽의 화가'로
프랑스혁명 시작되자 공화국 편에 서서
루이16세·앙투아네트 처형에 찬성하고
암살된 혁명가 추앙 '마라의 죽음' 그려
공화국 끝낸 황제로 나폴레옹 권력 잡자
영웅 떠받든 그림 '알프스 넘는 나폴레옹'
이기는 편서 걸작 남겼으나 끝내 버림받아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1793).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던 때에 그렸다. 그림 속 장 폴 마라는 당시 가장 급진적인 자코뱅파의 핵심인물이자 연일 반혁명파와 숙청 대상을 폭로하던 공포정치의 상징. 그 피의 숙청을 끝내려던 온건파 자객에 의해 집에서 암살당했다. 다음 날 국민공회에서 다비드는 이 사건을 그리겠다고 맹세했고, 마라를 문병한 기억을 살려 그림을 완성했다. 단순히 범죄현장을 재현한 기록화를 넘어 종교화의 순교 장면을 차용해 마라를 혁명의 성인으로 신격화했다. 캔버스에 유채, 165×128㎝. 벨기에왕립미술관(벨기에 브뤼셀) 소장.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1793).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던 때에 그렸다. 그림 속 장 폴 마라는 당시 가장 급진적인 자코뱅파의 핵심인물이자 연일 반혁명파와 숙청 대상을 폭로하던 공포정치의 상징. 그 피의 숙청을 끝내려던 온건파 자객에 의해 집에서 암살당했다. 다음 날 국민공회에서 다비드는 이 사건을 그리겠다고 맹세했고, 마라를 문병한 기억을 살려 그림을 완성했다. 단순히 범죄현장을 재현한 기록화를 넘어 종교화의 순교 장면을 차용해 마라를 혁명의 성인으로 신격화했다. 캔버스에 유채, 165×128㎝. 벨기에왕립미술관(벨기에 브뤼셀) 소장.
살아있는 권력만 좇은 붓…위대한 화가, 비루한 종말 [화폭역정 30]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1772년 여름, 막 스물네 살이 된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곡기를 끊었다. 프랑스왕립아카데미의 ‘로마상’에서 두 번째로 떨어진 뒤 상심 끝에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로마상은 화가 지망생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였다. 상을 받으면 국왕의 장학생이 돼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 왕실의 주문이 기다리는 탄탄대로가 이어질 것이었다. 동료 화가가 문 앞에서 그를 달래 겨우 방에서 끌어냈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또 떨어졌고 네 번째 도전인 1774년에야 그 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다비드는 왕실의 돈으로 성장했다. 1775년부터 다섯 해 동안 로마에서 국왕의 장학생으로 살았고, 돌아와서는 프랑스왕립아카데미의 회원이 됐으며, 서른여섯이 된 1784년부터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주문을 받았다. 그즈음 살롱에 걸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5)는 파리를 뒤흔들었다. 아버지가 치켜든 칼을 향해 세 아들이 팔을 뻗어 조국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그 그림으로 다비드는 유럽의 화가가 됐다. 1789년 여름 살롱에 걸린 ‘브루투스에게 두 아들의 시신을 인계하는 집행관’(1789)도 국왕의 주문이었다. 그 1789년이 어떤 해던가. 바로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때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5). 고대 로마의 도덕성과 애국심, 절제된 균형미를 완벽히 구현해낸 걸작으로 꼽힌다. 기원전 7세기 로마와 인근 도시 알바 롱가 사이의 전쟁이 배경이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왕가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려는 의도로 주문했고 다비드는 폭 4m를 넘기는 대작으로 완성하며 일약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하지만 4년 뒤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자 다비드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공화국 편에 서게 된다. 캔버스에 유채, 329.8×424.8㎝. 루브르박물관(프랑스 파리) 소장.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5). 고대 로마의 도덕성과 애국심, 절제된 균형미를 완벽히 구현해낸 걸작으로 꼽힌다. 기원전 7세기 로마와 인근 도시 알바 롱가 사이의 전쟁이 배경이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왕가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려는 의도로 주문했고 다비드는 폭 4m를 넘기는 대작으로 완성하며 일약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하지만 4년 뒤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자 다비드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공화국 편에 서게 된다. 캔버스에 유채, 329.8×424.8㎝. 루브르박물관(프랑스 파리) 소장.
국왕의 장학생, 국왕의 목을 베다

혁명의 과정은 지난했다. 국왕을 끌어안으려던 입헌군주정은 왕이 도주하려던 게 발각돼 3년 만에 무너졌다. 1793년 1월 국민공회에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을 정하는 호명 투표가 열렸는데, 다비드에게 차례가 오자 그는 짧게 답했다. “난 죽음에 표를 던진다”고 말이다. 그 무렵 다비드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벗이었고 가장 급진적인 자코뱅파(산악파)의 의석에 앉아 있었다. 왕을 처형한 공화국은 공포정치 속에서 혁명 지도자들을 차례로 단두대에 올렸다.

권력을 좇아 살아가는 예술가의 운명이란 그런 것일까. 이기는 편에 서서 다비드는 걸작들을 남겼다. 그러나 권력은 바뀌고, 다음 권력으로 갈아타야 했다. 이런 일이 거듭될수록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됐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브루투스에게 두 아들의 시신을 인계하는 집행관들’(1789). 고대 로마의 공화정 시절 에피소드를 설명한 작품이다. 당시 브루투스는 집정관이었고 두 아들은 아버지와 그 동료들에 반대하는 반란을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반란은 사전에 발각됐고 브루투스는 망설임 없이 두 아들의 목을 베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주문한 그림이지만 프랑스혁명 당시 공화국의 깃발이 돼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점령했을 때 전시한 기록이 있다. 캔버스에 유채, 323×422㎝. 루브르박물관(프랑스 파리) 소장.
자크 루이 다비드의 ‘브루투스에게 두 아들의 시신을 인계하는 집행관들’(1789). 고대 로마의 공화정 시절 에피소드를 설명한 작품이다. 당시 브루투스는 집정관이었고 두 아들은 아버지와 그 동료들에 반대하는 반란을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반란은 사전에 발각됐고 브루투스는 망설임 없이 두 아들의 목을 베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주문한 그림이지만 프랑스혁명 당시 공화국의 깃발이 돼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점령했을 때 전시한 기록이 있다. 캔버스에 유채, 323×422㎝. 루브르박물관(프랑스 파리) 소장.
다비드의 ‘갈지자 행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이 있다. ‘마라의 죽음’(1793)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 하나는 혁명 이후의 공화국을 위해 그렸고, 다른 하나는 그 공화국을 끝내고 왕정을 다시 시작한 나폴레옹을 위해 그린 것이다.

‘마라의 죽음’에 얽힌 서사는 이렇다. 날마다 신문에 반역자의 이름을 추가하던 장 폴 마라(1743∼1793)가 집안에 들인 젊은 여성 자객(샤를로트 코르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온건파였던 자객은 마라를 죽이면 피의 숙청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튿날 국민공회 연단에서 한 시민이 외쳤다. “다비드, 그대에게는 그려야 할 그림이 하나 더 남아 있소.” 의석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리하겠습니다.” 사실 다비드는 전전날 마라를 문병했던 터다. 알 수 없는 피부병으로 욕조에 누워 고통을 삭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림 속 마라는 마치 성인이 된 것처럼 보인다. 오른손은 깃펜을 놓지 않았고, 왼손에는 코르데의 편지가 들려 있다. 책상으로 썼던 듯한 나무상자 위에는 지폐 한 장과 ‘남편을 잃은 가난한 코르데에게 돈을 주라’는 쪽지가 놓였다. 이 쪽지는 실제와는 다르게 마라와 코르데의 선악구도를 만들기 위해 다비드가 연출한 것이다. 게다가 마라를 평생 괴롭힌 피부병은 온데간데없고 매끈한 살결만 보일 뿐이다. 길게 늘어진 팔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왔다. 다비드는 혁명을 위해 새로운 성상을 만들었다.

이 그림이 파리의 의사당 벽에 걸려 있는 동안 다비드는 혼란스러운 정치에 두 발을 담그고 있었다. 혁명재판의 그물을 짜던 보안위원회 위원으로 체포 명령서에 의심스러운 이들의 이름을 수백 건 올렸다. 혁명 전 그가 부부 초상을 그려 줬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이듬해 단두대에 올랐다. 다비드는 그의 구명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상이 조금 다를 뿐 무고했던 이들의 처형이 극심해지던 1794년 여름 어느 날 공의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붙었고, 이는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얼마 전 자코뱅 클럽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유언 같은 연설을 마치자 다비드는 일어나 외쳤다고 전한다. “그대가 독배를 마신다면 나도 함께 마시겠소.” 이튿날 로베스피에르는 연단을 빼앗기고 체포됐고 다른 스물두 명과 함께 참수됐지만 독배를 함께 마시겠다던 다비드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의사당 벽에는 여전히 ‘마라의 죽음’이 걸려 있었다.

며칠 뒤 공의회에 불려 나온 다비드는 땀에 젖어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을 얼마나 속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맹세했다. “이제부터 나는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오직 원칙에만 매이겠습니다.” 그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다비드는 곧 체포됐다. ‘마라의 죽음’도 의사당 벽에서 내려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비드는 사면됐고 ‘마라의 죽음’은 그의 작업실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에게 매이지 않겠다는 맹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1797년 말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스물여덟 살의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를 만난 날 다비드는 제자들 앞에서 들떠 말했다. “순수하고 위대하고, 고대처럼 아름답다. 옛날 같으면 제단을 세워 바쳤을 사람이다. 보나파르트는 나의 영웅이다.” 1799년 그 영웅이 쿠데타로 공화국을 사실상 끝냈을 때 다비드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가 공화주의자가 될 만큼 덕이 있진 못하다고 늘 생각해 왔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맑은 날 길잡이가 끄는 얌전한 노새를 타고 알프스 고개를 넘었다는 게 정설이지만 나폴레옹의 요구에 따라 거친 말과 폭풍을 보탠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연출했다. 그림이 마음에 든 나폴레옹은 3점을 더 주문했고 이외에 1점을 더 그려 총 5점의 판본이 있다. 이 첫 작품을 제외하고 망토색을 붉게 바꾸는 등 미세한 차이가 있는 5점은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 등에 흩어져 있다. 캔버스에 유채, 259×221㎝. 말메종성국립박물관(프랑스 뤼에유-말메종) 소장.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맑은 날 길잡이가 끄는 얌전한 노새를 타고 알프스 고개를 넘었다는 게 정설이지만 나폴레옹의 요구에 따라 거친 말과 폭풍을 보탠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연출했다. 그림이 마음에 든 나폴레옹은 3점을 더 주문했고 이외에 1점을 더 그려 총 5점의 판본이 있다. 이 첫 작품을 제외하고 망토색을 붉게 바꾸는 등 미세한 차이가 있는 5점은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 등에 흩어져 있다. 캔버스에 유채, 259×221㎝. 말메종성국립박물관(프랑스 뤼에유-말메종) 소장.
저 유명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이런 과정에서 탄생했다. 1800년 5월 나폴레옹은 알프스의 고개를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패퇴시켰다. 외교적인 이유로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스페인 국왕이 다비드에게 그 장면을 주문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조건을 달아 모델이 돼주기로 했다. 사나운 말 위에 침착하게 앉은 모습으로 그릴 것. 실제의 보나파르트는 맑은 날 길잡이가 끄는 노새를 타고 알프스 고개를 넘었지만 말이다.

다비드는 마라에게서는 피부병을 지웠고, 얌전한 노새를 탄 장군에게는 거친 말과 폭풍을 보탰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든 나폴레옹은 같은 그림을 3점 더 주문했고, 다비드는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의 수석화가가 됐다. 국왕의 장학생이 국왕을 죽이고, 공화국의 순교자를 그리고, 그 공화국을 끝낸 황제의 화가가 되기까지 채 30년이 걸리지 않았다.

30년 갈지자 행보 뒤 67세에 나라 밖으로 추방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가가 돌아왔을 때 다비드는 조용히만 지내면 무사할 수 있었다.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새 왕이 됐지만 지난 과오를 묻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듬해 봄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섬을 빠져나와 돌아오자 다비드는 다시 그의 편에 섰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곧 끝났다. 되돌아온 왕정은 백일천하에 가담한 자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 예순일곱의 다비드는 프랑스에서 추방돼 벨기에(당시는 네덜란드령) 브뤼셀로 떠났다. 제자들이 사면을 청원하자고 했을 때 그는 거절했다. 늦게 찾은 지조라고 할 수도 있고, 더는 잃을 게 없는 노인의 체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만년의 자크 루이 다비드.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제롬 마르탱 랑글루아(1779∼1838)의 그림을 에마블 르 보(1797∼1838)가 석판화로 제작해 1827년 4월 발행한 비평지 ‘르뷔 앙시클로페디크’에 뒤늦은 부고와 함께 실었다.
만년의 자크 루이 다비드.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제롬 마르탱 랑글루아(1779∼1838)의 그림을 에마블 르 보(1797∼1838)가 석판화로 제작해 1827년 4월 발행한 비평지 ‘르뷔 앙시클로페디크’에 뒤늦은 부고와 함께 실었다.
굳이 다비드를 변명하자면 그것은 조국을 위한 일이었다. 그는 프랑스가 위대하기를 바랐고 그 위대함을 약속하는 사람에게 그림을 바쳤다. 다만 다비드는 그를 키운 왕도, 함께 죽겠다던 벗도 지키지 않았다. 아마 그 둘 사이 어딘가에는 로마상에서 탈락해 방문을 걸어 잠갔던 스물네 살 청년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최고라고 인정받지 못하면 죽는 편이 낫다고 여겼던 마음 말이다.

다비드는 브뤼셀에서 일흔일곱의 생을 끝냈다. 말 위의 영웅은 지금 유럽의 여러 궁전에 흩어져 여전히 산 너머를 가리킨다. ‘마라의 죽음’은 오래 숨겨졌다가 후손의 손을 거쳐 브뤼셀왕립미술관에 들어갔다. 조국은 끝내 화가도, 혁명에 바친 그림도 받아 주지 않았다. 평생 프랑스를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겠지만 다비드는 이리저리 권력의 곁에서 주문을 받던 화가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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