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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1772년 여름, 막 스물네 살이 된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곡기를 끊었다. 프랑스왕립아카데미의 ‘로마상’에서 두 번째로 떨어진 뒤 상심 끝에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로마상은 화가 지망생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였다. 상을 받으면 국왕의 장학생이 돼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 왕실의 주문이 기다리는 탄탄대로가 이어질 것이었다. 동료 화가가 문 앞에서 그를 달래 겨우 방에서 끌어냈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또 떨어졌고 네 번째 도전인 1774년에야 그 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다비드는 왕실의 돈으로 성장했다. 1775년부터 다섯 해 동안 로마에서 국왕의 장학생으로 살았고, 돌아와서는 프랑스왕립아카데미의 회원이 됐으며, 서른여섯이 된 1784년부터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주문을 받았다. 그즈음 살롱에 걸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5)는 파리를 뒤흔들었다. 아버지가 치켜든 칼을 향해 세 아들이 팔을 뻗어 조국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그 그림으로 다비드는 유럽의 화가가 됐다. 1789년 여름 살롱에 걸린 ‘브루투스에게 두 아들의 시신을 인계하는 집행관’(1789)도 국왕의 주문이었다. 그 1789년이 어떤 해던가. 바로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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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과정은 지난했다. 국왕을 끌어안으려던 입헌군주정은 왕이 도주하려던 게 발각돼 3년 만에 무너졌다. 1793년 1월 국민공회에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을 정하는 호명 투표가 열렸는데, 다비드에게 차례가 오자 그는 짧게 답했다. “난 죽음에 표를 던진다”고 말이다. 그 무렵 다비드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벗이었고 가장 급진적인 자코뱅파(산악파)의 의석에 앉아 있었다. 왕을 처형한 공화국은 공포정치 속에서 혁명 지도자들을 차례로 단두대에 올렸다.
권력을 좇아 살아가는 예술가의 운명이란 그런 것일까. 이기는 편에 서서 다비드는 걸작들을 남겼다. 그러나 권력은 바뀌고, 다음 권력으로 갈아타야 했다. 이런 일이 거듭될수록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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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죽음’에 얽힌 서사는 이렇다. 날마다 신문에 반역자의 이름을 추가하던 장 폴 마라(1743∼1793)가 집안에 들인 젊은 여성 자객(샤를로트 코르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온건파였던 자객은 마라를 죽이면 피의 숙청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튿날 국민공회 연단에서 한 시민이 외쳤다. “다비드, 그대에게는 그려야 할 그림이 하나 더 남아 있소.” 의석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리하겠습니다.” 사실 다비드는 전전날 마라를 문병했던 터다. 알 수 없는 피부병으로 욕조에 누워 고통을 삭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림 속 마라는 마치 성인이 된 것처럼 보인다. 오른손은 깃펜을 놓지 않았고, 왼손에는 코르데의 편지가 들려 있다. 책상으로 썼던 듯한 나무상자 위에는 지폐 한 장과 ‘남편을 잃은 가난한 코르데에게 돈을 주라’는 쪽지가 놓였다. 이 쪽지는 실제와는 다르게 마라와 코르데의 선악구도를 만들기 위해 다비드가 연출한 것이다. 게다가 마라를 평생 괴롭힌 피부병은 온데간데없고 매끈한 살결만 보일 뿐이다. 길게 늘어진 팔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왔다. 다비드는 혁명을 위해 새로운 성상을 만들었다.
이 그림이 파리의 의사당 벽에 걸려 있는 동안 다비드는 혼란스러운 정치에 두 발을 담그고 있었다. 혁명재판의 그물을 짜던 보안위원회 위원으로 체포 명령서에 의심스러운 이들의 이름을 수백 건 올렸다. 혁명 전 그가 부부 초상을 그려 줬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이듬해 단두대에 올랐다. 다비드는 그의 구명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상이 조금 다를 뿐 무고했던 이들의 처형이 극심해지던 1794년 여름 어느 날 공의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붙었고, 이는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얼마 전 자코뱅 클럽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유언 같은 연설을 마치자 다비드는 일어나 외쳤다고 전한다. “그대가 독배를 마신다면 나도 함께 마시겠소.” 이튿날 로베스피에르는 연단을 빼앗기고 체포됐고 다른 스물두 명과 함께 참수됐지만 독배를 함께 마시겠다던 다비드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의사당 벽에는 여전히 ‘마라의 죽음’이 걸려 있었다.
며칠 뒤 공의회에 불려 나온 다비드는 땀에 젖어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을 얼마나 속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맹세했다. “이제부터 나는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오직 원칙에만 매이겠습니다.” 그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다비드는 곧 체포됐다. ‘마라의 죽음’도 의사당 벽에서 내려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비드는 사면됐고 ‘마라의 죽음’은 그의 작업실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에게 매이지 않겠다는 맹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1797년 말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스물여덟 살의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를 만난 날 다비드는 제자들 앞에서 들떠 말했다. “순수하고 위대하고, 고대처럼 아름답다. 옛날 같으면 제단을 세워 바쳤을 사람이다. 보나파르트는 나의 영웅이다.” 1799년 그 영웅이 쿠데타로 공화국을 사실상 끝냈을 때 다비드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가 공화주의자가 될 만큼 덕이 있진 못하다고 늘 생각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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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마라에게서는 피부병을 지웠고, 얌전한 노새를 탄 장군에게는 거친 말과 폭풍을 보탰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든 나폴레옹은 같은 그림을 3점 더 주문했고, 다비드는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의 수석화가가 됐다. 국왕의 장학생이 국왕을 죽이고, 공화국의 순교자를 그리고, 그 공화국을 끝낸 황제의 화가가 되기까지 채 30년이 걸리지 않았다.
30년 갈지자 행보 뒤 67세에 나라 밖으로 추방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가가 돌아왔을 때 다비드는 조용히만 지내면 무사할 수 있었다.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새 왕이 됐지만 지난 과오를 묻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듬해 봄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섬을 빠져나와 돌아오자 다비드는 다시 그의 편에 섰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곧 끝났다. 되돌아온 왕정은 백일천하에 가담한 자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 예순일곱의 다비드는 프랑스에서 추방돼 벨기에(당시는 네덜란드령) 브뤼셀로 떠났다. 제자들이 사면을 청원하자고 했을 때 그는 거절했다. 늦게 찾은 지조라고 할 수도 있고, 더는 잃을 게 없는 노인의 체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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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브뤼셀에서 일흔일곱의 생을 끝냈다. 말 위의 영웅은 지금 유럽의 여러 궁전에 흩어져 여전히 산 너머를 가리킨다. ‘마라의 죽음’은 오래 숨겨졌다가 후손의 손을 거쳐 브뤼셀왕립미술관에 들어갔다. 조국은 끝내 화가도, 혁명에 바친 그림도 받아 주지 않았다. 평생 프랑스를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겠지만 다비드는 이리저리 권력의 곁에서 주문을 받던 화가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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