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세(사진) 전 금융감독원장이 5일 서울대 강단에 섰다. 지난 3월 금감원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접은 지 6개월여 만이다. 서울대 경영학과 76학번인 권 전 원장은 올 2학기 재무특강을 통해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금융관료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권 전 원장은 첫 강의에서 한국 경제의 첫 번째 우선순위 과제로 ‘일자리 창출’을 꼽고, 일자리의 80%를 가진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일의 경우 은행과 기업 관계는 ‘오래된 친구’와 같다”며 “독일의 강소기업 ‘히든챔피언’이 생겨난 것도 이런 금융시스템이 일조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는 수익성 악화로 허덕이는 금융회사를 위해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금융은 ‘규제의 대상’이지 완화의 대상이 아니다. 금융을 완화해 실물경제를 살린다는 것은 결국 거품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며 “금융은 (경제가 활발히 돌아갈 수 있도록) 윤활유 역할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월가 금융기관들을 위해 금융규제 완화에 나서는 바람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초래됐다는 게 권 전 원장의 생각이다.
관료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잊지 않았다. 그는 “어떤 제도를 도입하든 ‘빛과 그림자’는 모두 있기 마련”이라며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자주 바꾸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제도를 바꿀 때 생기는 코스트(비용)가 엄청난 만큼 100% 확신이 없다면 그냥 놔두는 게 낫다”고 강조했다.
반면 정치권의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에는 일침을 가했다. 그는 “한 제도를 도입할 때 70~80%는 덕을 보고 20~30%는 손해를 본다고 치면 덕을 보는 사람은 아무 말이 없고, 손해 보는 사람은 격렬하게 저항한다”며 “정치인들이 저항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다 보니 다수의 행복이 묻힐 때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 원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양적 완화 출구전략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없으리라고 단언했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금융은 펀더멘탈이 좋아졌다”며 “금융회사에 대한 자금관리가 잘됐고 건전성도 높아져 신흥국 대부분은 고전하지만 우리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평소 생각을 담은 경제에세이집도 다음달 초 출간한다. 30여 년간의 경제관료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진단과 나아갈 방향 등을 적었다. 그는 “일자리 창출과 부동산 문제, 창년 실업 등에 대한 제언과 함께 과거 저축은행 사태 뒷이야기 등도 넣어 영화 보듯이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 전 원장은 1956년 대구 출생으로 경북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 행시 23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재무부 세제국, 보험국을 두루 거쳐 금융정책과장, 금감위 감독정책 1국장, 금융위 사무처장, 부위원장직을 역임했다. 2011년 3월부터 올 3월까지는 금감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