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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1891년 6월, 프랑스에서 출발한 배가 남태평양 타히티의 항구 파페에테에 닿았다. 두 달 넘게 바다를 건너온 폴 고갱(1848~1903)은 막 마흔셋이 된 참이었다. 뒤로한 유럽에는 아내와 다섯 아이가 있다. 앞에 펼쳐진 타히티에는 야자수와 따뜻한 바다, 아직 자신의 그림에 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있다. 고갱은 이곳에서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삶을 만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배에서 내린 고갱을 맞은 것은 이미 유럽의 손길이 많은 것을 변화시킨 풍경이었다. 타히티는 1880년 프랑스에 병합됐고, 수도인 파페에테에는 식민지 관리와 상인, 선교사들이 살고 있었다. 원주민의 생활에도 오랜 선교의 흔적이 남아 고갱이 상상한 것처럼 문명의 바깥에서 시간을 잊고 살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바뀌는 세상과 생계가 있었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권력과 종교에 적응하며 살아온 역사가 있었다. 유럽에서 간 화가에게는 자신이 보지 못했던 낙원이 필요했지만 타히티 사람들에게는 식민지 시절을 견디는 삶이 있을 뿐이었다.
도착 장면을 생각하면 이상한 질문이 생긴다. 고갱은 타히티를 만나러 간 것일까, 자신이 상상한 타히티를 확인하러 간 것일까. 여행이란 대개 두 가지가 뒤섞이는 일이긴 하다. 우리는 낯선 곳을 보러 가면서도 그곳이 자신이 기대한 모습이기를 바란다. 문제는 기대와 현실이 다를 때다. 기대를 고치는 사람이 있고, 현실에서 골라 보는 사람이 있다. 고갱은 그 차이를 그림으로 메운 사람이었다. 그것은 위대한 회화가 탄생하는 방식이기도 했고, 한 세상의 실제 모습이 가려지는 방식이기도 했다.
붓은 타히티 풍경에, 눈은 파리 미술시장에
고갱은 처음부터 세상과 불화하던 가난한 화가가 아니었다. 파리에서 증권업에 종사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고, 덴마크 출신 메테 소피 가드(1850∼1920)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림은 일을 마친 뒤 취미로 그렸으며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사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카미유 피사로에게 배우고 인상파 전시에 참여하면서 그림에 쏟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1882년 증시 붕괴를 전후하면서는 결국 생업이던 증권맨의 길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당장 생활이 어려워지자 가족은 아내의 고향인 덴마크로 옮겨갔고 얼마 뒤 고갱만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부부 사이의 거리는 벌어졌다. 이후 고갱의 생애를 따라가면 프랑스의 브르타뉴,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다시 프랑스의 아를, 남태평양의 타히티와 히바오아가 차례로 등장한다. 미술사에서는 새로운 화풍을 향한 탐색의 여정으로 기록하지만 집에 남은 사람의 달력에는 남편과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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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로 간 뒤에도 고갱은 파리의 화단과 시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럽을 떠났으나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기를 바란 곳은 여전히 유럽이었다. 타히티에 도착한 이듬해 그린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는 이 복잡한 화가를 들여다볼 좋은 입구다. 성모 마리아에게 건네는 인사 ‘마리아여, 평안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이 그림은 우리가 익숙하게 봐온 성모자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붉은 천을 허리에 두른 여인이 아이를 어깨에 앉히고 서 있는데, 여인과 아이의 피부는 갈색이고 두 사람의 머리에는 후광이 둘렸다. 마리아와 예수가 타히티 사람이 된 것이다. 유럽에는 타히티란 미지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종교적 도상을 이용해 한 걸음 가깝게 다가갔다.
그렇게 고갱은 종교적 성스러움이 백인의 얼굴에만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서양 종교화의 중심에 갈색 피부의 어머니를 세워 익숙한 위계를 흔들어 보고자 한 것일까. 반대로 타히티 여인의 존엄을 보여주기 위해 굳이 성모를 차용한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을 뒤섞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자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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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은 이 그림에 사연을 붙였다. 늦게 집으로 돌아왔더니 등불이 꺼져 있었고 어둠 속의 소녀가 두려움에 굳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공포를 현지의 영혼에 대한 민간신앙과 연결해 설명했다. 그러나 소녀가 두려워한 것은 유령이 아니라 늦은 시간 들이닥친 고갱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림 속 공포가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 실제 테하아마나가 그날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
물론 노란 천과 보랏빛 배경이 만들어 내는 긴장, 침상과 몸과 어둠이 겹치는 방식은 눈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색채가 훌륭하다고 감탄하는 그 순간, 한 사람의 취약한 모습이 우리의 감상을 위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매독 환자였던 고갱은 테하아마나뿐 아니라 다른 소녀들에게도 병을 옮겼고 아이를 출산하게 했지만, 그들을 책임지지는 않았다.
원시자연 칭송하면서 고급 포도주·시가 등 유럽에서 공수
고갱이란 이름이 이토록 판단하기 어려운 이름이 된 데는 윌리엄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1919)가 한몫을 했다. 이 소설은 고갱의 생애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전기는 아니지만 증권업을 버리고 남태평양으로 간 화가의 이미지는 고갱의 삶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인물은 우리가 실행하지 못하는 욕망을 대신 살아준다. 그렇게 고갱의 삶은 실제와는 달리 신화화됐다.
고갱은 프랑스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20세기 초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상)와의 정기송금 계약, 간헐적인 그림 판매대금, 삼촌에게서 받은 유산 등으로 적지 않은 돈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돈을 가족에게 보내는 대신 자신의 안락·향락을 위해 다 써버렸다. 약물을 구입하고 작업 환경을 치장하는 데 전액을 탕진했다. 원시의 자연을 칭송하면서도 정작 생활은 서구식 편의에 의존했다. 유럽산 고급 포도주·샴페인, 버터, 육류 통조림, 비스킷, 시가 등을 선박 편으로 대량 주문해 소비했다. 원주민 소녀들을 모델 겸 성적 파트너로 거처에 묶어두고,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렇게 마르티니크, 타히티, 히바오아로 이어진 고갱의 여정은 1903년 5월 끝을 봤다. 쉰다섯 번째 생일을 한 달 남짓 앞두고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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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테하아마나는 고갱이 그림들에서 여러 번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 행동에 고갱은 설명을 붙이긴 했지만 실은 그도 잘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갱의 그림은 앞으로도 오래 살아남을 것인데 그림 앞에 선 한 사람으로서 유감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자세히, 더 똑바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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