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까지, 정확히는 지난 1월20일까지 서울시 용산구청 앞 대형 구조물에 쓰여 있던 메시지이다.
이 간판이 내려진 1월20일은 이른바 `용산 참사`가 발생한 날이다. 구청이 용산 재개발지역 철거 세입자들의 농성을 겨냥해 걸었다가 사고가 터지자 부랴부랴 내렸다.
떼법과 포퓰리즘의 악순환을 비판하기 위해 그 간판을 소재 삼아 글을 썼던 필자에게는 여간 씁쓸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관련기사: ☞떼법·정서법..포퓰리즘의 사생아)
사고가 난지 1년이 다 됐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려 저항하던 세입자들도 이들의 불법행위를 막기 위해 몸을 던졌던 공권력도 모두 `루저(loser: 패배자)`로 남아있다. 법도 공권력도 정의도 간 곳 없이 증오와 부정(否定)만이, 불가피성과 예외인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만이 넘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입자들의 각별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법질서 확립'이라는 대의명분을 좇고 공권력 행사의 불가피성에 동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것이야 말로 종국에는 우리 모두에게 이롭게 작용할 것이라고 필자가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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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짧은 고민을 끝내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대해 특별 사면복권을 결정했다.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동계 올림픽 유치에 큰 힘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고 한다. 법의식 훼손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올림픽 유치에 따라오는 국민경제적 이익을 대기업 CEO 출신의 국가지도자 답게 비즈니스 감각의 저울에 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저울이 국익에 합치하느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비용과 효익에 대한 분석은 적용기간이나 분석 방식에 따라 결과가 상이하다.
단기적으로는 올림픽으로 얻는 게 크다고 볼 수 있겠지만, 한 번 크게 상한 법의식은 장기간 누적되는 비용으로 우리에게 작용할 것이다.
사소한 범칙행위 단속쯤에는 '왜 나만이냐'는 저항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제2, 제3의 용산사태가 없으란 보장도 없다.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의 각료에게 위장전입쯤은 티끌조차도 되지 않는 사회풍토가 계속될 것이고, "돈만 있으면 죄가 없다(有錢無罪)"는 믿음이 발전해 결국에는 "죄를 지어야만 돈을 번다(有罪有錢)"는 신화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법이란 매우 냉혹해 온기가 없다. 저마다의 사연에도 불구하고 처벌의 대상이 된 이들에게는 법집행이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법의 일관된 지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 것이 우리 `다수`의 자유를 보호할 것이라는 오랜 믿음 때문이다.
법의 지배가 아닌, 저마다 다른 관용과 실리의 잣대를 법에 적용하는 `재량의 지배` 아래에서는 그 누구도, 심지어는 재량을 행사하는 권위자 조차도 법으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보호받을 수 없을 것이다.
법이 자신의 자유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개인의 선택은 제한적이다. 남보다 앞서 법을 어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자위(自衛)일 수 있으며, 이 것이 보편화될 때 우리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자연상태로 퇴행할 것이다.
물론 이번 사면의 옳고 그름은 영원히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올림픽 유치에 따르는 이익은 가시적이고 어느정도 계량이 가능한 영역이지만, 법의식 훼손에 따르는 비용은 다수가 공감할 만큼의 객관적 수치로 산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에 힘입어 경제적 이익을 체감하는 사람은 다수 있겠지만, 사면권 남발이 결국엔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게 됐다고 깨닫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것이야 말로 포퓰리즘의 뿌리이며,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것이다.
이 대통령 자신은 '충분히 예상된 각계의 비판 여론을 감수하면서 용기있게 국익을 선택한 지도자'라고 평가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더 두려워하는 것은 `법 위에 존재하는 철인(哲人) 지도자`이다.
대통령의 사면행위 역시나 법에 기반한 것이었다면, 차제에 사면권에 대한 규제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