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상하고 아름다운 ‘호시노 코믹스의 세계’

김미경 기자I 2023.06.09 15:33:57

식물기
호시노 도모유키|228쪽|그물코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그런 식으로 상상하여 번식하는 사람이 하나둘 나타났다. 잃은 자식을 새로 만드는 부모. 앞세운 반려자를 번식하는 파트너. 천수를 누린 부모를 이 세상에 다시 불러내는 자기중심적인 자식. (중략) 탄생한 사람들에게 진짜 피와 살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디어 프루던스’ 60쪽).

“배꼽에 피어스처럼 싹을 심거나, 이끼로 눈썹을 디자인하는 순수한 패션으로부터 시작해 뜨거운 여름날 뙤약볕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이 머리에 토란잎을 우산처럼 키우기도 했습니다”(‘스킨 플랜트’ 89쪽).

“일흔 살이 되어 식물전환수술을 받아도 늦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식물전환수술을 받기로 한 전 여자 친구를 설득하는 편지’ 119쪽).

일본 작가 호시노 도모유키의 소설집 ‘식물기’(그물코)는 현실의 관념과 규범을 훌쩍 뛰어넘는 실험과 상상으로 가득하다. ‘인간 은행’에 이어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쓴다”고 극찬한 작가 맞다.

식물기(호시노 도모유키|228쪽|그물코).
작가 호시노는 “나는 내내 식물과 함께 소설을 써왔다”며 “식물을 언어로 삼아 소설 속에 살고, 늘어나는대로 뒀다. 이 작품집은 그 식물들을 모아 심은 것”이라고 했다.

11편의 단편은 생명을 향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쾌한 서사를 보여준다. 비틀즈의 곡에서 영감을 받아 쓴 동명의 소설 ‘디어 프루던스’는 전염병 시대를 견디기 위해 애벌레가 되어 자신이 살던 집 정원에서 풀을 갉아먹으며 지내는 예순일곱의 아줌마가 외로움에 틀어박힌 옆집 소녀 시리고미짱에게 말을 건네는 이야기다. “상상하는 내가 존재하는 한, 항상 똑같은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다.

‘기억하는 밀림’은 영화배우 히스 레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히스 언덕으로 떠난 위로 여행에서 만나 소라히코와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킨 플랜트’는 호시노의 첫 단편집 ‘인간 은행’을 통해 소개된 작품으로, 번역을 다듬어 재수록했다. ‘고사리태엽’은 생명공학 기술의 발달로 식물전환수술이 가능해진 시대를 배경으로 한 SF(공상과학) 소설이다. 호시노만의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식물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제목은 죽은 자를 기리는 의미를 가진 한자 ‘기’(忌)를 쓰고 있다. 소설들은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만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식물은 인간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지만, 인간은 식물이 없다면 금세 죽고 말 것인데 과연 인간은 식물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되묻는다.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식물이 되고 싶다는 호시노의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책은 “인간인 채로 식물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 경지를 향한 그 절박한 호소다. 이번 책 역시 ‘인간 은행’에 이어 김석희가 옮겼다. 화가로도 활동하는 그는 ‘식물기’의 표지 그림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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