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프랑스인들은 올해 9월부터 1000유로(약 130만원)가 넘는 물건은 현금으로 살 수 없게 됐다. 수표나 신용카드 결제만 가능하다. 현금으로 결제할 수 있는 가격의 상한선을 제한해 현금 발급량을 줄이고 현금이 지하경제로 흘러가지 않도록 예방하겠다는 것이다.
‘현금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나라는 프랑스 만 아니다. 북유럽 덴마크에서는 일부 소매업종에 대해 현금 결제를 거부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 중이며 스웨덴은 대중교통요금의 현금결제를 제한하고 약 70%의 시중은행이 전자적 결제수단만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이스라엘정부는 지난해 5월 ‘세계 최초의 현금 없는 국가 추진위원회’를 총리 직속으로 발족시켰다.
대한민국도 현금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효찬 여신금융연구소 실장은 “현금없는 사회는 경제 시스템의 각 부문의 비효율성을 제거해 경제성장을 유도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며 “특히 우리나라는 현금결제비중이 낮음에도 지하경제규모가 커 현금결제수단을 억제하고 비현금결제수단 사용을 촉진할 만한 정책적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금이 없다는 것은 앞으로는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대신 사람들은 카드, 어음, 계좌이체 등을 통해 ‘숫자’만 주고받을 뿐이다. 금고, 장롱 속에 들어와있던 돈은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에, 상당한 지하경제 양성화 효과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한국은행이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박범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게 제출한 최근 5년간(2010년~2015년 6월말) 5만원권 회수율 자료에 따르면, 연평균 회수율은 46.5%로 절반도 안된다. 상당수가 불법적이고 음성화된 곳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 실장은 “현금없는 사회를 만들면 현금 사용으로 유발되는 각종 범죄를 감소시킬 수 있다”며 “강도, 절도 등 현금보유와 직접 관련있는 범죄 외에도 탈세, 뇌물 공여 등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미주리주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생활보조금을 현금과 교환 가능한 쿠폰에서 기명식 전자결제카드로 전환한 이후 범죄율이 9.8% 감소했다.
최근 갈 수록 중요해지는 통화정책의 효과를 높이는 측면에서도 현금없는 사회는 유력한 대안으로 손꼽히고 있다. 미국·유럽(ECB)·일본 등 대다수의 선진국들의 기준금리가 ‘제로’(0) 금리에 근접해 있지만 경제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중앙은행들이 채권을 사들여 돈을 보급하고 있지만, 이는 은행의 보유고만 채울 뿐 사회 곳곳에 돈이 흘러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에 돈을 맡기면 오히려 이자를 내는 ‘마이너스금리’ 정책이 소비를 촉진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현금없는 사회가 필수적이다. 현금사회에서는 ‘마이너스금리’를 적용하면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찾아 집안의 금고에 넣어두기 때문이다. 이는 곧 ‘뱅크런’(bankrun)으로 이어져 우리사회 금융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 그러나 현금없는 사회에서는 ‘돈’이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은행 계좌와 연결돼 있어야 하기 때문에 뱅크런이 발생할 수 없다. 거시경제학계의 거장 하버드대의 맨큐(Mankiw)교수와 로고프(Rofoff) 교수도 ‘마이너스정책금리 도입’을 위한 선행조건으로 이를 주장했다.
이 실장은 “현금없는 사회가 추진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관련 세제혜택을 강화하고 현금 보유와 관리비용을 높이는 한편, 지불결제시스템의 참여 이해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추진 협의체를 구성해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