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수연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생활필수품목 50개의 가격 집중관리`를 지시한지 하루만에 정부가 생필품 50개 품목 물가지수를 새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대통령 말씀에 고심하던 정부가 리스트에 없던 물가지수를 급조하려는 것인데요. 이런 결론이 나오기까지 가까이서 관가 분위기를 지켜본 김수연 기자가 정황을 전합니다.
#장면 1. 17일 오전, 지식경제부의 대통령 업무보고. 보고를 받기에 앞서 대통령이 경제 위기와 물가에 대한 우려의 말을 꺼낸다. "생활필수품목 50개에 해당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관리하라"
대통령은 또 말했다. "공산품 값이 오르는 건 어쩔수 없지만 서민에게 필요한 생필품 대책은 정부가 특별히 세우면 서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생필품에 해당하는 품목 50개를 집중적으로 관리하면 전체 물가는 상승해도 50개 품목은 그에 비례해서 올라가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중소기업 육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해서도 말을 이어간다.
#장면 2. 50개 생필품? 뉴스를 통해 대통령 지시를 접한 지식경제부 공무원들,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리 부에 지시하셨다는데..그런데 50개 품목이 뭐지? 기획재정부 소관인가? `
같은 시각, 기획재정부 물가 담당자들도 50개 생필품의 정체를 밝히느라 분주하다. 상품과 서비스 등 489개 품목으로 매월 소비자물가 통계를 내는 통계청도 이게 뭔지 궁금할 따름이다.
기자들도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대체 50개의 정체가 뭐냐? 재정부 담당 기자는 재정부에, 지식경제부 담당 기자는 지식경제부에 소관 부서를 찾아댄다. 대통령 말씀인데 청와대 담당 기자도 가만 있을 리 없다. 어떤 기자는 인터넷 검색에 몰두한다.
오후 내내 어느 공무원을 붙잡고 물어도 `50개 생필품 물가`의 정체를 아는 이가 없다.
#장면 3. 하루가 지났다. 이런 장면이 연출된다. ▲기자 : "대통령이 그냥 대충 `한 50개`를 말한 거 아닐까요?" ▲재정부 공무원 : "아니 그런 거는 아니고요,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된 필수품이 50개 가량 되거든요..그러니까 그거를...(땀 뻘뻘)"
이날 재정부는 생필품 50개로 구성된 새 지수를 만들기로 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50개에 편입할 품목을 지정할 참이다.
이상이 지난 `1박 2일`간 관가에서 `생필품 50개`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동입니다. 소동은 결국 50개 생필품 지수를 새로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 됐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으면 만들면 된다! 참으로 기발한 관료식 창의성입니다. 지수 하나 새로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라 치고, 50개를 지정하고 나면 해당 품목들의 가격은 어떻게 관리하자는 걸까요. 편입된 품목은 무조건 값 올리지 말라고 해당 제조사의 팔이라도 비틀어야 하나요? 이에 대한 공무원의 답은 이렇습니다. "이미 워치 하던거를 좀 더 열심히 워치해야죠 뭐..."
묻는 기자나, 대답하는 관료나 서로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가는 한 나라의 경제상황을 보여주고, 국내는 물론 해외 투자자들도 돈을 굴릴 때 반드시 들여다봐야 하는 지표입니다. 물가 잡는 것도 좋지만, 물가안정을 전제로 특정품목 50개를 추려 관리한다면 그 지표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제시하는 비전과 방향을 정책으로 실현하는 게 공무원들 업무라지만, 아무리 대통령 말씀이래도 없는 건 없다, 아닌 건 아니라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역시 관료의 일 아닌가요.
콧대높기로 유명한 재정부 공무원들의 자존심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참여정부에서 잘 나갔던 공무원이 세상 바뀌었다고 "이제와 하는 얘긴데, 나 그때 참 힘들었어, 그들이랑 영 안맞는걸 맞춰가며 일하느라고"라 푸념하는 건 차라리 애교스럽습니다.
정권 초기 '군기'가 바짝 들었고, 새 대통령의 위엄이 추상같다 한들 대통령 한마디에 물가지수 새로 만들겠다고 허겁지겁 나서는 건 3류 코메디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통령 지시에 없는 물가 지수를 새로 만들면, 그럼 전국의 톨게이트를 다 뒤져도 찾아낼 수 없었던 영구미제, `차가 하루 220대 다니는 톨게이트`도 새로 하나 지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