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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떠난 지 32년, 아내는 비로소 세상에 작품을 맡겼다

오현주 기자I 2022.10.20 14:05:26

△국제갤러리서 '이승조 전' 연 아내 고정자
원통 '파이프' 기하추상 개척, 마흔아홉에 타계
마지막 7년 동안 '핵' 연작 1000호급 줄줄이 내
"남편 대작 홀대 못본다" 미술관 외 소장처 제한
이우환 "때 기다려라" 격려…상업화랑서 26년만

1968년 작가 이승조(왼쪽)와 2022년 작가의 아내 고정자. ‘제12회 현대작가초대전’에 낸 출품작 ‘핵 10’(1968·129.5×130㎝) 옆에서 이 작가는 모처럼 미소를 머금고 있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이승조 전’에 나온 ‘핵 86-27’(1986·227×182㎝) 옆에는 작가의 아내가 섰다. 안성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여기 한 작가가 있다. 아무도 보지 못했고, 시도조차 못한 그림을 그렸다. 원통 모양의 파이프를 주축으로 철저하고 엄격하게 만들어낸 추상세계였다. 떡잎부터 화려했다. 추상이란 말 대신 ‘전위예술’ ‘아방가르드’라 했던 1960년대, 20대 나이로 이미 선봉에 섰으니까. 홍익대 서양화과 60학번 동기들과 1962년 ‘오리진’이란 단체를 만든 게 시작이다. 차가운 금속성 색감을 입은 선과 면이, 계산으로 꾸려낸 기하학적 세상을 내보이는 듯했다.

‘핵’(nucleus)이란 연작명은 참으로 적절했더랬다. 문명의 건조한 미래, 기계의 미학적 연출을 보는 듯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이의 파이프가 멈췄다. 뻗어나가는 파이프의 끝을 보겠다며 5∼7m 규모의 대작쯤은 우습게 꺼내놓던 그때였다. ‘이제 시작’이라고 했던 그 절정기에 그이는 세상을 떠났다. 마흔아홉에 생과 붓을 접은 이승조(1941∼1990)다.

이승조의 ‘핵 87-99’(1987·200×400㎝). 원통 파이프 이미지를 가로로 변주해 마치 입체작품인 듯한 착시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의 정점을 찍은 대작 중 하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 여기 한 작가의 아내가 있다. 그림밖에 모르던 남편에 대한 내조가 그이의 과업이었다. 명색이 화가의 아내인데, 붓 빠는 일을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작업에 관한 한 남편은 모든 걸 기꺼이 혼자 다 했으니까. 그렇다면 어떤 내조를? 남편이 별걱정 없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살림을 꾸리는 일이었다. 수입으로 10이 생기면 7로 화구를 산 뒤 3으로 살았다고 했다. ‘최고의 작품은 최고의 재료에서 나온다’고 믿는 남편이었고 그런 남편을 아내는 인정했다.

돌아보니 마지막 소원이었던, 남편의 한도 해결했다. 살던 집을 팔고 곗돈을 모아 경기 안성에 스튜디오를 장만해준 거다. 작은 캔버스에서 벗어나 파이프가 끝없이 확장해가는 거대한 세계를 내보이고 싶어한 남편은, 그렇게 꿈을 이뤘다. 하지만 그토록 어렵게 마련한 작업실에서 고작 7년뿐이었다. 결국 마흔둘의 나이에 남편의 ‘빛’과 ‘빚’을 다 끌어안은 이승조의 아내 고정자(74) 여사다.

작가 이승조의 아내 고정자 여사가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이승조 전’에 건 ‘핵 90-10, 90-11’(1986∼1990·229.5×699㎝) 옆에 섰다. 안성 스튜디오에서 마지막으로 작업한 미완성 대작으로 이번 전시작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 뒤로 ‘핵’(1984·193.5×224)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남긴 작품 100여점뿐…한점 한점 행방 신중해질 수밖에”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이승조 전’을 열고 있는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작가 대신 작가의 아내가 서 있다. 이승조의 예술혼이 꿈틀대는 전시장에서 고 여사를 만난 건 두 번째. 2년 전인 2020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연 대형회고전 ‘이승조: 도열하는 기둥’이 처음이었더랬다. 당시 “회고전이 아닌 재조명전”이라고 거침없이 말한 건 그이뿐이었다. “시대에 따라 예술혼은 수정해야 하고, 그게 가치있는 일”이라고도 했다. 관람객처럼 작품 곁을 맴돌았지만, 막상 입을 떼자 단호하고 선명한 비평가가 돼 있었다. 지난 30여년이, 지고지순한 전업주부였던 그이를 절반은 ‘이승조 전문가’, 절반은 ‘미술전문가’로 바꿔버린 거다. 아니 그냥 ‘이승조’가 됐다. 그렇다고 지난 세월의 무게가 가벼웠다고 할 수 있겠나. 그 암담한 먹먹함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가시질 않았다.

그땐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이를 만나야 할 이유가 분명했던 거다. 남편의 살인 듯 피인 듯 지켜온 ‘이승조 컬렉션’을 상업화랑에 내건 까닭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상업화랑에 작품을 내놨다는 건 작품을 팔겠다는 의지니까. “최고의 퀄리티로 작품을 지켜내는 것이 유족으로 남은 할 일”이라고 말했던 그이가 아닌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국제갤러리 ‘이승조 전’ 전경. ‘핵 F-77’(1971·145×145㎝·왼쪽)와 ‘핵 89-20’(1989·145×89.5㎝)이 나란히 걸렸다. 단순한 색감을 입은 세련된 미감의 파이프. 얼추 20년을 사이에 둔 두 작품에선 세월의 거리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국제갤러리가 이승조와 이승조의 작품을 세상에 알릴, 큰 계획을 제시하더라. 해외로, 미술관으로, 다시 화랑으로 순회하는. 그렇게만 된다면 지난 재조명전 이후 진전된 성과를 낼 수 있겠다 싶었다. 이미 준비된 이승조를 한국을 너머 세계시장에까지 체계적으로 알려갈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고 여사에겐 불안감이 있었나 보다. 작품이 팔려 여기저기 흩어지면 남편의 흔적도 따라 흩어질 것 같은. 그래서 작품 소장은 대중이 함께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엄중하게 제한해왔던 거다. 왜 그렇게까지? 이 대답 한마디로 그 사정을 이해했다. “남편이 남긴 작품 수가 100여점밖에 안 된다. 물론 여느 작가의 300점 가치를 가지기는 했지만.”

국제갤러리 ‘이승조 전’ 전경. ‘핵 78-21’(1978·128.5×500.5㎝·왼쪽)과 ‘핵 88-19’(1988·195×132.5㎝) 등 이 작가의 대작이 줄줄이 걸린 전시장에는 관람객들이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도 그럴 것이 이승조의 작품은 ‘대단히 크다.’ 타계하기 전 7년간, 그러니까 안성 스튜디오에서의 가히 정점으로 끌어올린 말기작은 1000호를 넘나들 만큼 어마어마하다. 그런 대작이 행여 제대로 걸리지도 못하고 여기저기서 홀대받는 ‘꼴’은 죽어도 보기가 싫었던 거다. 그러니 어쩌겠나. 작품 한점 한점이 나갈 행방에 신중해질 수밖에.

국내 갤러리에서 연 전시는 1996년 현대화랑에서 연 개인전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혀갈 그때, 전시를 찾은 이우환(86) 화백의 한마디가 가슴에 꽂혔더란다. “‘지금은 이승조의 때가 아니다. 한국사회가 좀더 메커니컬해져야 이승조를 이해할 수 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하시더라.” 그래, 차라리 때를 기다리며 늦게나마 알려나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확신을 얻었다고 할까. “그게 쉽지, 이미 흩어진 작품을 나중에 다시 모으는 건 정말 어렵지 않겠나.”

작가 이승조의 아내 고정자 여사가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이승조 전’을 둘러보다가 나란히 걸린 ‘핵 74-07’(1974·145×145㎝·왼쪽)과 ‘핵 75-10’(1975·146×146㎝)을 오래 바라봤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상 안타는 게 더 어렵다” 어록 만든 작품들 나와

26년 만의 ‘갤러리 전시’에는 30여점이 걸렸다. 하나하나, 의미가 없는 작품이 없다. 안성 스튜디오에서 나온 마지막 미완성 대작 ‘핵 90-10, 90-11’(1986∼1990·229.5×699㎝)이 걸렸고, 몇장 남지 않은 작가의 옛 사진에서 함께 찍힌 ‘핵 10’(1968·129.5×130㎝)도 나왔다. 1968년 ‘제12회 현대작가초대전’에 낸 출품작 옆에서 작가는 모처럼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승조의 ‘핵 10’(1968·129.5×130㎝). 이 작가가 1968년 ‘제12회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작으로 내고 그 옆에 서서 빛바랜 사진 한 점으로 기록했던, 바로 그 사진 속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승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 속 작품들도 따라나왔다. “상을 타기도 어렵지만 안 타는 게 더 어렵다”는 그 유명한 어록을 탄생시킨 일화 말이다. 바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연달아 4회 수상하는 파란을 일으켰던 건데. 그것도 이전엔 단 한 차례도 없던 추상회화로 말이다. 보수적인 국전도 어쩔 수 없이 수상작으로 낼 만큼 탁월했다는 얘기다. 국전 제18회(1969)와 제19회(1970)에서 각각 수상한 ‘핵 G-99’(1968·162.2×130㎝), ‘핵 PM-76’(1969·161.4×161.5㎝)이 마주 보고 걸렸다.

이승조의 ‘핵 PM-76’(1969·161.4×161.5㎝). 1970년 제1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수상한 작품이다. 이 작가는 1968∼1971년 국전에서 연달아 4회 수상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상을 타기도 어렵지만 안 타는 게 더 어렵다”는 어록을 탄생시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승조의 ‘핵 PM-76’(1969·161.4×161.5㎝) 부분. 테이프로 캔버스에 경계를 정한 뒤 납작한 평붓으로 그러데이션을 주며 만들어낸 선·면이 보인다. 초기작이지만 이후 절정의 작품들 못지않게 대단히 정교하고 균일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승조의 ‘핵 G-99’(1968·162.2×130㎝) 앞에 선 한 관람객이 오래 머물렀다. 1969년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수상한 작품이다. 이 작가는 1968∼1971년 국전에서 연달아 4회 수상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상을 타기도 어렵지만 안 타는 게 더 어렵다”는 어록을 탄생시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 작가가 청혼할 때 고 여사가 들은 말이 “평범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라”였다나. 그런데 이토록 비범한 삶을 살게 할 줄은 자신도 몰랐을 거다.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은 돈을 빌리며 살았는데, 그후엔 다신 빌리지 않았다”는 뒷얘기는 2년이 지나서야 들었다. ‘아름다운 죽음’이었다고 되레 다른 이들을 위로했던 그이가 남편이 떠난 그날 이후 5년여간 집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는 얘기도 이제야 꺼내놨다.

지난 일은 바래거나 포장되게 마련인데도, 그이의 잣대는 작가의 엄격한 추상 그 이상이다. 건조했을 작가의 생애가 뒤늦게 촉촉해졌다면, 남들이 ‘차가운 추상’이라고 말해온 작품에서 따뜻한 온기가 보인다면, 그건 온전히 작가의 아내가 평생을 짜낸 ‘죽을 힘’ 덕분이어야 한다. 전시는 30일까지.

국제갤러리 ‘이승조 전’ 전경. 한 관람객이 이승조의 ‘핵 90-10, 90-11’(1986∼1990·229.5×699㎝)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안성 스튜디오에서 마지막으로 작업한 미완성 대작으로 이번 전시작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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