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조용만기자] 세계 금융의 심장 월스트리트의 동향을 전하는 기사에 종종 등장하는 `고든 게코`라는 이름이 있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 1987년에 제작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월 스트리트`의 주인공이다.
월가 브로커인 게코는 악명높은 기업 사냥꾼으로 등장하는데, "탐욕은 선(Greed is good)"이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금융시장에서 약육강식과 제로섬이 무엇인지를 그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근 월가에서는 두 명의 게코류 인사가 주목받고 있다. 실화의 주인공은 커크 커코리언과 데이비드 테퍼. 억만장자 커코리언은 세계 41대 갑부(보유재산 89억달러)로 투자회사 트라신다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 88세로 내일 떠나도 호상(好喪)소리를 들을 나이지만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 GM을 상대로 사냥에 나섰다.
마흔살이나 어린 사냥꾼 페터(47세)는 헤지펀드 아팔루사 사장이다. 골드만 삭스에서 정크본드 투자로 명성을 날린 그는 파산위기를 맞은 델파이 주식을 9.3%나 사들여 관심 인물로 급부상했다.
델파이는 지난 주말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시장에 충격파를 던졌다. 파산보호는 우리네 법정관리다. 적자와 고비용에 시달리던 델파이는 임금과 복지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조와의 협상이 여의치 않자 법원에 회사를 살려달라며 SOS를 쳤다. 불똥은 모기업인 GM으로 곧바로 옮겨붙었다. GM은 신용등급 추가 하락으로 싸구려 부실채권이 됐고 주가도 급락하면서 동반 파산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
사냥꾼들은 흔적과 냄새로 사냥감을 찾는다. 기업 사냥꾼들은 돈 냄새에 특히 민감하다. 다른 사람들이 리스크를 이유로 주식을 내던질 때 커코리언과 테퍼는 과감하게 리스크에 베팅했다.
커코리언은 지난 5월 GM이 정크본드 수준으로 추락했을 당시 공개매수를 선언하고 기존 지분을 2배로 늘렸다. 당초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는 것 처럼 말했지만, 델파이 여파로 GM이 위기를 맞자 지분을 10% 가까이로 늘리며 이사회 입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라스베가스에서 카지노로 대박을 터뜨린 커코리언은 베팅에 강하다. 1990년대 크라이슬러 인수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수법은 당시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크라이슬러가 경영난에 처하자 주식을 끌어 모은뒤 경영권을 요구했고, 거절당하자 추가로 지분을 확보해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다. 당시 커코리언이 영입했던 구조조정 전문가 제롬 요크는 이번에 GM 몰이꾼으로 다시 등장했다.
테퍼도 내로라 하는 사냥꾼이다. 파산했거나 파산직전에 몰린 기업을 사들여 차익을 실현해 왔으며, 테퍼의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high risk-high return) 전략은 월가에서 유명하다. 별명은 `시장의 테레사 수녀`.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기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되살려 냈다는 의미인 듯 하다.
그동안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아팔루사 펀드의 투자 수익률은 연평균 30%를 넘어서고 있고, 그의 연봉은 헤지펀드 매니저중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그는 파산보호 신청전 주가의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델파이 주식을 32센트에 대량 매집, 일약 2대 주주로 부상했다.
사냥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를 느끼거나, 사냥감을 팔아서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기업 사냥꾼들은 돈되는 알짜 자산부터 팔아치운다. 돈이 안되는 사업은 없애고, 돈드는 인력이나 투자는 최소한으로 줄인다. 그래서 회사가치가 올라가면 지분을 되팔아 차익을 챙긴다.
여기서 한가지 원칙을 짚어보자. IMF를 겪으면서 우리는 부실경영에 대한 손실부담 원칙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기업이 망하면 주주와 경영진, 종업원이 함께 책임을 나눠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업 사냥꾼 기준으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부실경영의 책임은 분담이라기 보다 사실상 종업원 전담에 가깝다.
델파이는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구조조정 도중 경영진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도록 보너스와 지분 등 각종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다. GM과 델파이 기존 주주들은 최근 주가 하락으로 손해를 봤지만, 사냥꾼들의 목적이 주주이익 극대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손실을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사냥꾼들은 경영권 접수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하면 고배당 등으로 회삿돈을 풀어 소액 주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잘린 종업원 대부분은 실업수당 신청 대열에 줄 설 도리 밖에는 없다. GM의 릭 왜고너 회장은 지난 6월 경영난이 심화되자 2008년 말까지 미국내 조립공장과 부품공장을 추가 폐쇄하고, 2만5000명 이상의 인력을 감축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델파이도 회생을 위해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할 부분이 임금삭감과 인력감축이다. 예단하기 어렵지만 사냥꾼들이 GM과 델파이를 접수할 경우 뼈를 깎는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운이 좋아 기업에 남는다고 쳐도, 알짜는 빼가고 껍데기만 남은 회사에 더 이상 비전은 없다. 우리도 IMF이후 외국계 펀드를 주인으로 맞아들이며 숱하게 겪어봤던 경험들이다.
탐욕은 누구를 위한 선(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