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신춘호 농심 창업주는 은둔의 기업인이다. 언론 인터뷰도 공개 석상도 꺼렸다. 자본금 500만원짜리 라면 회사를 매출 2조6000억원대 회사로 일으켜 세운 경영 수완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은 채 그는 지난달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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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변호사는 농심이 창업(1965년)하기 이전부터 신 회장과 교분을 쌓았고, 롯데공업(농심 전신) 상호로 형과 분쟁이 일자 법률 자문을 제공하면서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김 변호사는 율촌재단 이사, 농심 법률자문(1985~2011년)과 사외이사(2012~2021년)를 지냈다.
알만한 이들은 둘을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불렀는데, 김 변호사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친구 같은 사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건강이 좋을 때는 1주일에 한 번은 만났고, 여행을 자주 다녔으며, 함께 라면을 먹던 골프 친구”라고 했다. 김 변호사 입을 빌려 은둔의 경영자 신 회장의 삶을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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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간 지켜본 기업인 신춘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기업인으로는 너무 정직했던 사람이다.
-‘너무’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인가.
△이윤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장사꾼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철두철미, 원리원칙으로 제품만 생각했던 사람이다.
-언론 인터뷰나 공개석상을 꺼리는 은둔의 기업인이었다.
△원래 나서서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쇼업(Show up·외향적이라는 취지)하는 걸 싫어했다. 나서야 하는 일이 있으면 전문 경영인에게 맡겼다. 제품만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은 자녀도 신 회장을 닮은 거 같다.
-문상을 온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신 회장을 ‘정경유착을 경계한 기업인’이라고 하더라.
△아주 맞는 말이다.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장애물을 만나는데, 돌파 방법은 여럿이 있다. 제품만 좋으면 된다고 봤기에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다. 신 회장이 생전에 법원과 검찰을 드나든 적이 없지 않은가.
-어떤 제품을 제일 애착했는가.
△‘신라면’이다. 라면이라면 세계 1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을 라면쟁이라고 칭했다. 본사 집무실 옆에 임원 식당을 마련해서 식사를 주로 해결했는데, 여기서 라면을 같이 먹은 기억이 있다. 신라면 다음엔 ‘새우깡’을 좋아했다.
-어떤 제품을 제일 아쉬워했나.
△‘백산수’(생수)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백산수는 백두산 천지를 수원으로 하기 때문에 수질이 으뜸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끝까지 생수 1등 하는 걸 보지 못해 아쉬워했다. 그만큼 애착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최고의 식음료를 만들고자 했기에 그러지 않았나 싶다.
(애초 농심은 ‘제주삼다수’ 유통을 맡아 생수시장 1위를 하다가 2012년 제조사인 제주도개발공사와 재계약이 불발하자 생수 사업에 뛰어들어 백산수를 출시했다. 현재 백산수는 생수 업계 3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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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은 바는) 없다. 다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친한 거 같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독립한 이후로 두 집안에 왕래가 없었던 것으로 안다. 조카(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가 작은아버지(신춘호)를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신 회장이 거부한 탓인가.
△조카가 찾아온다는데 오지 말라고 할 삼촌이 있겠나. 사촌관계인 자녀들끼리로도 교류가 없는 걸로 안다. (농심에 따르면, 실제로는 사촌끼리 애경사 등을 계기로 인적 교류를 했다고 한다.)
-형제 사이가 왜 틀어졌다고 하던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신격호 명예회장은 자기 사업을 동생(신춘호 회장)이 한국에서 맡아서 키우기를 바랐던 거 같다. 그런데 동생이 자기 사업을 하려고 하자 그랬을 것(관계가 틀어진 것)이다.
-형제는 늘 불화했나.
△형에게 양보한 적도 있다. 신 회장은 1960년대 을지로에 있던 유명한 중국 요릿집 ‘아서원’ 부지를 사들였다. 농심이 이 땅을 터로 잡아서 훗날 독자적인 사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부지를 형에게 매입 원가에 매각했다. 롯데호텔을 지으려면 이 땅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여기에 롯데호텔이 올라갔다. 아서원(부지)이 없었다면 롯데호텔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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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좋아했고 골프를 잘 쳤다. 한창 때는 함께 골프를 했기에 실력을 안다. 싱글 플레이어(73~81타) 수준이었고, 파 플레이(72타·이븐파)도 여러 번 한 걸로 기억한다. 골프를 그만둔 지는 몇 년 됐는데, 그전까지는 자주 쳤다. 워낙 건강체질이라서 특별히 건강 관리하는 건 못 봤다. 가리는 음식도 없었다.
-신 회장을 마지막으로 언제 만나서 어떤 얘기를 나누었나.
△임종을 지키진 못했지만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봤다. 말년에 특별히 했던 말은 없었다. 원래 말이 없는 분이다.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던데, 둘은 어떤 호칭을 썼나.
△나는 ‘회장님’, 신 회장은 ‘변호사’라고 불렀다. 형과 아우보다 친구 같은 사이였다. 건강할 때는 1주일에 한 번씩은 만났다. 해외여행을 같이 자주 다녔다. 집무실 옆에 임원 식당을 마련한 것도, 호주 여행 때 내가 소개한 기업을 들렀다가 영감을 얻은 것이다.
(신춘호 회장 빈소에는 김 변호사가 보낸 근조화환이 맨 앞에 놓여 있었다. 농심 측의 ‘화환 의전’에서 둘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근조 화환은 ‘삼일회 회장 김진억’으로 보냈는데 삼일회는 둘이 하던 친목 모임이다. 손상모 전 동부그룹 부회장도 이 모임 회원이다. 김 변호사는 영결식에 직접 나와서 조사를 읽기도 했다.)
-신 회장은 종교가 있었나.
△없다. 부인(김낙양 여사)이 독실한 불교 신자이긴 하다. 절에 가서 공양을 손수 준비하곤 했는데 재벌 부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소박했다. 신 회장 자녀가 재벌 티를 내지 않는 건 이런 모습을 닮은 거 같다.